<장편연재소설> 무대일가 마지막회

등록 2004.03.19 13:00수정 2004.03.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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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밤이다. 두 사람이 고향을 떠난다는 것을 알게된 임실댁과 한산댁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동섭이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주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고향을 떠나면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는가? 남자 없이 사는 여자들의 소원을 좀 들어주게."


두 사람은 간곡히 청하는 정도가 아니라 울먹이고 있었다. 전주댁은 그간의 사정을 설명하지도 제발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손을 꽉 쥐고 그들의 슬픔을 모조리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막무가내였다. 그러다가 임실댁이 힘겨웠던 시집살이로 화제를 옮긴다.

"그 때는 어느 누구에게 의지할 사람이 있었는가. 남편이나 믿고 사는 것이었는데, 어디 남정네들이 여자 마음을 헤아려줄 아량들이 있어야제. 그 때까지 부모 품을 떠나지 못한 애들이나 마찬가지였제. 그래 우리는 남정네를 차지하기 위해 시오마이하고 눈에 안 보이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말이야 바른 말이제, 제대로 숨을 쉬고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단께. 시어머니의 말이 아니면 울고 싶어도 울 수 없고, 웃고 싶어도 웃을 수 없었제. "

"그 때는 정말 왜 그리 힘이 들었는지 몰라."

전주댁은 미소를 띠며 지난 일을 떠올린다. 그 때 두 사람은 전주댁이 마음을 털어놓고 실컷 울 수 있게 해 주었다. 딸이 아니라 며느리였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억울한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딸처럼 잘 지내고 싶다, 고 수시로 말했다. 며느리는 며느리이지 딸이 될 수 없어. 그러니 제대로 며느리 대접을 해주었어야 옳았어.

두 사람은 전주댁을 보내지 않기 위해 그 이후의 잡다한 일들도 끄집어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씨 가에 시집온 여자들이 가문의 귀신이 되기 위한 과정의 일환으로 행해진 일은 작고 사소한 것에 불과하달 수 있었지만 각자에게 많은 상처를 남겨 놓았다. 이윽고 각기 다른 시기에 한씨 가문에 발을 들여놓은 세 여자는 서로 손을 맞잡고 울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전주댁은 두 사람에게 절대 고향을 떠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되풀이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길에서 만나는 마을 사람들마다 동섭과 전주댁에게 고향을 떠나느냐고 물었다. 이 때마다 두 사람은 대답하느라 애를 먹었다.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설명할 수도,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사 이틀 전까지도 두 사람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동섭이 이사를 결정한 것은 1992년 3월 1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살기 위해서, 미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주댁은 동섭에게 수고를 끼치지 않고 애초의 생각으로 되돌아왔다.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하든 내 중심만 지키면 된다는 평소 그녀의 말처럼. 사실 그녀는 영수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그녀는 권위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포악한 아들을 누를 수단이 없었다.


동섭이 오랫동안 한 자리에 있었던 쌀뒤주를 들어내자, 전주댁은 몇십 년 간 사용해 낡고 때에 찌든 세간을 하나씩 들어내 닦고 포장하기 시작한다. 곳곳에 틀어박힌 짐은 많지만 실상 쓸 만한 것이 없다.

이삿짐을 싸다가 동섭은 문득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과거에 누군가가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구였던가? 그는 가장 최근에 이삿짐을 싼 영수, 명자와 사위의 이삿짐과 그 이전으로 훑어 올라갔다. 그러다 퍼뜩 짚이는 것이 있다. 그가 삼십 세 무렵에 쌌던 아버지의 이삿짐이었다. 신이 난 동생들은 마루와 방을 오가며 속시원하다는 몸짓을 보임으로서 마지못해 짐을 싸고 있던 동섭을 조롱했다. 이삿짐을 다 쌌을 때 했던 아버지의 말도 떠올랐다. 이제 정말 이 집에는 질렸다는 듯 아버지는 큰소리로 외쳤다.

"다시는 내가 이 집구석에 발을 디디는가 봐라!"

그런데 그 때와 지금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때는 그는 장남으로서 남았고 이제는 영수가 남게 되었다. 인물들만 바뀌었을 뿐 상황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느낌에 당황한 동섭은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도를 얼른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는 궁색하지만 두 사건의 차이점을 발견해냈고 그것을 자신과 조물주에게 들려주고 있다. 전답을 팔지 않고 두고 간다는 점. 다시 오리라는 생각. 아버지처럼 빚을 지며 산 적이 없이 소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았다는 것. 울산과 대전이라는 서로 다른 지역. 그 다음에는…… 또 뭐가 있을까.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었다. 조물주에게보다 그 자신이 먼저 충분하지 않음을 느꼈다.

성이 차지 않자, 동섭은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에이 될 대로 되라, 고 외쳤다. 그것이 운명이든, 조물주의 요술이든 두 개의 개별적인 사건이 정말 우연히 맞아떨어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도대체 어떻단 말인가, 그는 그런 심정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하루 전 날, 동섭은 전주댁과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울산에 가서 사는 동안 먹을 양식으로 쌀 세 가마를 새끼줄로 칭칭 얽어 놓았고, 된장이나 간장이 담긴 장독도 운반하기 쉽게 새끼줄을 매달아 놓았다. 그릇은 모두 신문지에 싸서 포개어 깨지지 않도록 했고, 옷가지들도 종이박스에 차곡차곡 쟁여서 끈으로 묶어 놓았다.

마침내 고향을 떠날 날이 밝자, 동섭은 묶어 놓았던 짐을 하나씩 마당으로 내 놓기 시작한다. 그것을 보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삿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러 왔고, 네 명의 계원들이 곧 들이닥쳤다 ― 친목계를 조직할 때만 해도 십여 명이던 것이 차츰 도시로 빠져나가고 이제 넷밖에 남지 않았다.

"쓰잘 데기 없는 것은 다 버려!"

짐이 보잘것없음을 안 김순철이 심드렁하게 말한다.

"가먼 도로 사야될 것들인께 그냥 내다놔요."

지금껏 전주댁이 세간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왔는지 김순철이 알 리 없었다. 그들이 이삿짐을 마당으로 내려놓기 전에 안동섭이 모는 트럭이 도착해서 뒷부분부터 들어오고 있다. 잠시 후 트럭이 멈추고 안동섭, 명자, 경수가 트럭에서 내린다.

"벌써 짐을 다 싸 놨네!"

명자가 마당에 늘어선 짐을 보고 말했다. 안동섭은 트럭 위에 올라서서 짐을 하나씩 올리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막 짐을 차에 싣기 시작했을 때 앞집 임실댁이 다급한 걸음으로 나타났다.

"안 간다더니 왜 간다고 이래?"

처음에 놀라고 그 다음에는 화가 난 표정으로 임실댁이 전주댁을 쳐다본다.

"갈 사람은 가야지……."

전주댁이 웃음을 띠며 용서를 비는 뜻으로 눈꼬리를 내린다.

"가서 살기가 괴롭거든 짐 풀지 말고 그냥 도로 올라 와."

그보다 먼저 와 있던 한산댁이 종이박스에 잡동사니를 주워 담으며 전주댁에게 말했다.

"그래요, 성님."

전주댁이 은빛 치아를 드러내며 짧게 대답한다. 이 때 동섭의 계원 중의 한 사람인 홍동수가 김판수와 함께 장독을 옮기려고 허리를 굽히다가 마땅찮은 듯 혀를 찬다.

"나갈라먼 젊어서 나가제, 나이 들어서 고향 등지고 어찌 살라고 짐을 쌌는가? 마음을 돌려봐."

"그러지, 조금 살아보다가 힘들면 돌아오겠네."

동섭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유나 그간의 경과야 어찌되었든 이 곳은 동섭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해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았던 고향이었다. 그러면서 동섭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고향을 떠날 때도 과연 이렇게 따사로운 사람들의 배웅을 받았던가, 하고.

짐을 싣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농학박사'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꼼꼼한 동섭이 미리 짐을 싸두었기도 하지만, 원체 짐이 될 만한 것이 없어 1톤 트럭으로도 더 실을 여유가 있었다. 짐을 모두 싣자, 안동섭이 트럭의 시동을 걸며 명자에게 말했다.

"장인어른하고 장모님은 당신이 모시고 와. 나하고 경수는 트럭을 타고 갈 테니까."

사람들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가 어렴풋이 이 말을 들은 동섭은 명자가 가까이 오자, 무어라고 말하기 전에 선수를 친다.

"아는 사람 보기 부끄럽다. 그냥 트럭 타고 갈란다."

"트럭 타고 6시간이나 갈라면 힘들어요. 그냥 인월 가서 직행 타고 가요?"

동섭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다. 명자는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마루에 앉아 있던 전주댁에게로 간다.

"그럼 어머이가 버스 타고 가요."

"나도 느그 아부지하고 트럭 타고 갈란께 느그가 직행 타고 오이라."

말을 마친 전주댁이 얼굴을 한쪽 손으로 가린다.

"그래도."

전주댁은 마디가 굵어지고 거칠어진 손을 휘젓는다. 명자는 남편에게 그 말을 전하기 위해 마당으로 걸어간다. 그것을 보며 동섭은 집을 한 바퀴 돌기 위해 뒤안으로 들어간다. 작은 흙 부스러기, 담에 놓인 돌들이 자신이 담고 있는 동섭에 대한 추억을 되돌려준다. 살아 생전에 내가 이 집에 다시 올 수 있을란가……. 동섭은 중얼거린다. 그 때 언제 쫓아왔는지 뒤에서 전주댁이 소리 높여 외친다.

"우리가 왜 못 돌아와요? 돌아와야제."

전주댁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금껏 전주댁은 늘 동섭 가까이에 있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하고 시정할 것을 요구했고, 때로 울먹이거나 한숨을 쉬었다. 동섭이 고개를 떨구자 전주댁이 변명 삼아 말한다.

"창수 죽고는 아무 때고 그냥 눈물이 나와요."

잠시 후 트럭의 엔진소리의 부르릉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두 사람은 아랫방 모퉁이를 지나 트럭을 향해 걸어간다. 차문을 열고 기다리던 명자가 두 사람을 태운 후 문을 닫아 준다.

"다시 돌아와서 같이 살아요!"

임실댁이 차창 옆으로 다가와 좌석에 앉은 전주댁에게 말했다. 전주댁은 마르지 않은 눈으로 임실댁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트럭이 움직이자,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손을 흔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 중에 손을 흔들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홍동수였다. 옆에 있던 김판수가 이유를 묻자 홍동수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돌아올 건디 내가 왜 손을 흔든다요?"

그 때문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웃어댔고 차안에 있던 사람들도 영문을 모른 채 웃었다. 트럭이 집 입구를 벗어나려고 하자, 동섭은 창문을 열고 뒤를 돌아본다.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섞인 명자와 경수가 등을 돌린 채 집을 올려다 보고 있다. 그 순간 트럭이 배나무가 서 있는 모퉁이를 돌아가며 동섭이 55년 동안 살아온 집을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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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문학세계》에 「매직을 훔친 아이」가, 《문학과 창작》에 「리오그란데를 찾아서」가 당선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다. 소설집으로 「장례식에의 초대」, 「로터리에 앉아 있던 새」 해양문고 「우리 바다가 품은 온갖 이야기」, 에세이 <지금은 별을 보며 한걸음 내디딜 때>가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양산에 거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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