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조부모 모시는 산골소녀의 희망

예산 '소녀가장' 김지혜양...정부지원 해당 안돼 생계 막막

등록 2004.03.29 17:31수정 2004.03.29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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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열다섯 살인 김지혜(신양중 2)양은 지난해 6월부터 집안 살림을 하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 저수지 아래에 있는 지혜네 집에는 할아버지 김석주(77)씨와 할머니 문정애(69)씨, 지혜 이렇게 세 식구가 살고 있다. 밭일을 다니시며 생활비를 벌던 할머니가 10달 전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뒤부터 지혜네 집은 엉망이 돼버렸다.

다리 장애와 한쪽 눈 실명으로 농사일이 불가능한 할아버지의 수발을 들으며 학교에 다니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 같으면 새벽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지혜는 서둘러 일어나 아침밥을 지어먹고 집을 나서야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지혜에게는 오히려 휴식인지도 모른다.

하교 길, 마을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드물어 죽천까지만 차를 타고 온다. 그리고 1시간을 걸어 집으로 오면 저녁 7시, 교복을 벗어놓자마자 저녁밥을 지어먹고 치우고 나면 벌써 잘 시간이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한방을 쓰면서 변변한 책상 하나 갖지 못한 중학교 2학년짜리 지혜에게 어쩌면 책상은 필요치 않은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움직여 산고랑 논에서 식구들 먹을 양식을 마련해 왔는데 이도저도 모두 손을 놓고 있다. 3월 초에 퇴원하신 할머니는 왼쪽 마비로 지팡이에 의존해 방안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도 힘에 부쳐 하신다. 밥을 드실 때도 마비된 쪽으로 자꾸 음식이 흐른다. 병원에서는 계속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입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할머니가 서둘러 퇴원을 해 온 까닭이다.

a 담임교사와 함께 기자를 자신의 집에 안내하고 꿋꿋하게 대답하던 지혜도 사진찍기는 거부했다. 곱고 가녀린 지혜의 얼굴에 그늘이 걷힐 날은 언제일까. 지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굳이 문에까지 나와 배웅했다.

담임교사와 함께 기자를 자신의 집에 안내하고 꿋꿋하게 대답하던 지혜도 사진찍기는 거부했다. 곱고 가녀린 지혜의 얼굴에 그늘이 걷힐 날은 언제일까. 지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굳이 문에까지 나와 배웅했다. ⓒ 장선애

예산 지역신문인 <무한정보>에 사정을 알려온 지혜의 학교 담임 송용배 교사는 “다른 아이들 같으면 아무 걱정 없이 부모님 사랑 듬뿍 받으며 학교에 다닐 나이인데 지혜의 짐이 너무 무겁다. 공부할 시간도 없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중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학교생활도 잘 하는 게 대견하기만 하다”면서 “기억에도 없는 부모님 얘기, 집안형편을 얘기할 때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지혜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게다가 지혜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교통사고를 당해 얻은 다리 상처 후유증으로 지난해 재수술을 받았지만 상처가 쉬 아물지 않아 걱정이다. 발등부터 허벅지까지 깊게 난 상처의 첫 수술이 잘못돼 지난해 재수술을 받고 퇴원한 뒤 교통비와 병원비가 없어 통원치료를 포기했더니 그 자리의 진물이 멈추지 않는다.


한창 예민한 사춘기인데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나가는 걸 꺼려하지 않을까 싶어 의향을 물으니 “괜찮아요” 한 마디하고는 이내 고개를 꺾는다. 우선 당장 생계와 할머니 치료비 마련에 어떻게든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리라.

사정이 이 정도인데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조도 받지 않은 게 이상하다. 할아버지 장애 등급은 지원기준에 못 미치고, 50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고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이 동거인으로 돼 있어 기초생활수급자에도 선정되지 못한다.


지혜의 경우 소년소녀가장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지혜의 부모님이 어디선가 살아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여파로 지혜는 학교 급식비와 육성회비 혜택을 받지 못해 또 걱정이다.

지혜 할아버지는 “자식들 국민학교(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가르쳐 다들 사는 게 그런가 싶어 손녀딸은 중학교까지 보냈더니 제대로 마칠까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쉰다. 함께 있던 송 교사가 “할머니가 얼른 일어나셔서 지혜 고등학교도 보내야지 무슨 말씀이냐”고 나섰으나 지금으로선 공허한 얘기인 것을 모두 안다. 지혜의 머리가 더욱 숙여진다.

면사무소에서도 지혜네 집의 딱한 사정을 알고 노력하고 있지만 ‘규정’에 근거해야 하는 공무 특성 때문에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그나마 동네사람들이 반찬을 날라다주고 객지에 있는 큰아빠와 고모가 가끔 들르지만 모두 형편이 좋지 않아 언제까지 기댈 수만도 없다.

생후 한 달도 안된 지혜가 ‘핏덩어리’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게 된 기막힌 사연, 지혜의 부모에 관한 얘기는 차마 기사에 담을 수 없다.

취재 내내 지혜 할머니의 손을 주무르고 있던 송 교사는 “지금 당장 생계가 급한 상황이지만 가능하다면 꾸준한 후원을 받아 지혜가 계속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뜻 있는 이들의 연락을 당부했다.

041-333-7032/ 019-407-6033(신양중학교 송용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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