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탁 안에서 손이 불쑥~"

시체놀이에서 애국가 제창까지... 새내기 선생님의 만우절 체험기

등록 2004.04.02 07:06수정 2004.04.04 20:17
0
원고료로 응원
2004년 4월 1일. 만우절 장난으로 거꾸로 걸려 있는 다른반 명패
▲2004년 4월 1일. 만우절 장난으로 거꾸로 걸려 있는 다른반 명패 박종희
'2학년 2반'이 4월 1일 만우절 5교시 들어가야 할 반이다. 하지만 뒤집힌 2학년 3반 명패가 교실 앞에 걸려 있다. 복도 창문으로 얼굴 하나가 쏙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선생님 온다! 조용해! 야, 조용하라고!"

무슨 작전일까? 봉변을 면하기 위해서 앞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교실 뒷문을 열었다. 파릇한 2학년 2반 아이들이 난데없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책상이며 교탁에 널부러져 있는 시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시체, 허리가 꺾여 있는 시체 등등 나름대로 노력한 모양이다.

"재밌나? 고마해라!"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키득거리며 일어난다. "겨우 이 정도냐, 만우절에 유행 지난 시체놀이라니∼"라고 코웃음치며 교탁에 서는 순간, 손이 튀어나와 "확" 다리를 잡는 것이 아닌가.

"헉."

나지막이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순간 교실이 뒤집어진다. 자기들딴에는 뭔가 성공했다는 분위기다.

"앗싸, 성공! 우히히." "야호." "선생님, 놀랐죠?" "재밌죠!"


지선이가 교탁 아래서 특유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기어 나온다.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아이들을 자리에 앉게 했다.

"먼지 날리는 바닥에 엎드려 있느라 고생했다. 재밌긴 한데. 자, 그만하고. 반장 인사하자!"


애써 아이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수업을 시작하려고 반장을 불렀다. 한 녀석이 일어나는데 보니 원래 반장이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차렷"하고 '인사'를 하는데, 허리를 굽혀 인사를 받는 순간 "안녕하세요" 대신 엉뚱한 말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만우절 제대로 쇠려고 작정을 했나 보다. 하지만 선생인 나는 전날 잠을 잘 자지 못한 탓에 아이들 장난에 대거리도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릿속이 흐렸다. 예상과는 달리 조용한 나의 반응에 여기저기서 불평의 소리가 들려 왔다.

"선생님, 재미없어요? 선생님 기분 풀어주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피이∼."

어제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었는데 그걸 2반 학생들에게 상담 비슷하게 말했다. 그랬더니 그게 아이들 맘에 걸렸나 보다. 날도 날이거니와 선생인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많은 것(?)을 준비한 것 같았다.

물론 아이들의 성의는 고마웠지만, 교과 진도가 늦어서 어쨌든 조금이라도 수업을 해야 했다. 게르만족이 이동하며 로마가 쇠퇴하는 과정을 프리젠테이션으로 보여주며 수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잠시 미소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는 순간, 갑자기 한 녀석이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아닌가.

"아악!"

머리통을 감싸고 머리카락을 헝클어 대며 말 그대로 '발작'을 하는 형세였다.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아이에게 간질 증세가 나타난 줄 알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역시 꾸민 것이었고, 교실에서는 또 한번 웃음 폭탄이 터졌다.

"얘들아 여러 가지 하는구나. 근데 연기가 조금 어설펐다. 제발 그만혀."

그런데, 놀란 가슴을 달랠 틈도 없이 아이들의 만우절 놀이는 이어졌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를때 손수 만든 태극기를 흔들어 보이는 아이들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부를때 손수 만든 태극기를 흔들어 보이는 아이들 박종희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힙합 버전으로 부르며 개성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녀석은 손수 그린 태극기를 신나게 흔들어댔다.

그렇게 하다 보니 45분 수업에 35분이 지나갔다. 하지만 수업을 못했다는 생각보다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2004년 만우절, 해맑은 아이들의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다. 결국 카메라를 가져와서 아이들의 모습을 담았다. 그리고 나도 뭔가 해 보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박수에 힘을 얻어 대학 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때로는 그대의 따끔한 말이 싫기도 했어∼ 하지만 그건 그만큼의 후더운 사랑∼ 나 역시 그대가 지쳤을 때에 힘이 되고파…."

재간둥이 지선이. 어떤 포즈도 자연스럽게, 어떤 노래도 거리낌 없이 부르는 끼 많은 아이
▲재간둥이 지선이. 어떤 포즈도 자연스럽게, 어떤 노래도 거리낌 없이 부르는 끼 많은 아이 박종희
나의 노래가 끝나자 2학년 2반 재간둥이 지선이의 답가도 이어졌다. 어느덧 수업은 끝날 때가 다 되었고, 이제서야 진짜(!) 반장이 일어나 인사를 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이 선생님을 보낼 녀석들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대신, 다른 인사말이 울려 퍼졌다.

"선생님, 사랑해요!"

이 녀석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처음 교단에 서서 맞게 된 학생들이다. 새내기 선생님. 분명 나는 열정은 있지만 어설픈 총각 선생님으로 비쳐졌을 터이다. 지난 한달의 시간 동안 당황스러운 적도 있었고 인상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아이들에게 고마운 점,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어제 아이들에게 못한 말이 있다.

"애들아! 사실 선생님은 '사랑합니다'라는 인사가 더 듣기 좋구나!"

사회시간, 만우절 테러를 감행한 2학년 2반 아이들
▲사회시간, 만우절 테러를 감행한 2학년 2반 아이들 박종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독일 유학파 베테랑 연주자의 월급명세서...말문이 막힌다 독일 유학파 베테랑 연주자의 월급명세서...말문이 막힌다
  2. 2 찌기만 해도 '천연 영양제'로 손색 없는 여름 식재료 찌기만 해도 '천연 영양제'로 손색 없는 여름 식재료
  3. 3 공정위가 공개한 이 사진... "시민들 삶이 화이트보드에서 결정됐다" 공정위가 공개한 이 사진... "시민들 삶이 화이트보드에서 결정됐다"
  4. 4 "문자의 역사를 파고들수록 한글, 세계에서 가장 쉽고 편하다는 거 절감" "문자의 역사를 파고들수록 한글, 세계에서 가장 쉽고 편하다는 거 절감"
  5. 5 경주 최씨가 대림동 최씨가 되는 '이상한 나라' 경주 최씨가 대림동 최씨가 되는 '이상한 나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