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 이주의 신간] 늦봄, 김광일 기자의 글맛에 취하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를 권하며

등록 2004.05.26 21:52수정 2004.05.27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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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가서

맞다. 이건 결단코 '맛'이다.

조선일보 문학담당 기자 김광일의 문장은 혀끝을 간질이며 미뢰를 자극하는 오렌지맛 젤리 혹은, 토질 비옥한 보르도에서 한정생산 된다는 미묘한 맛의 레드와인을 닮았다. 섬세하고 따뜻하며, 말랑거리면서도 때론 드라이하다. 그의 글은 뛰어난 질감으로 독자들의 혀에서 즐겁게 씹힌다.


문학담당 기자 중엔 '맛'이 아닌 '향기'로 제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이 많다. 10여년간 세계일보에서 문학담당을 독식하며 특유의 '감상적인 분위기'로 독자를 압도하는 조용호, 기사문에 시적 감수성을 투영하는데 능란한 재주를 보이는 국민일보 정철훈, 작가보다 더 작가적인 향취-물론 그 냄새란 술냄새일 경우가 허다하지만-를 온몸으로 뿜어내는 중앙일보 이경철(현 <문예중앙> 주간) 등은 이미 '향기 있는 기사'로 자신들만의 영역을 구축한 베테랑 문학기자들이다.

멀리 가자면 한국일보의 '전설적인' 문학 쌍두마차 김훈과 박래부 기자가 있고, 더 멀리 가자면 60대 문단 이면사를 정리해 <글동네에서 생긴 일>이란 책까지 낸 중앙일보의 정규웅 기자 등도 있지만, 그들은 이미 '향기로운 문학기사 쓰기'를 접고 또 다른 영역으로 옮겨간 사람들.

이렇듯 명멸해온 문학기자의 연대기 속에서 '향기'가 아닌 '맛'으로 나름의 일가를 이룬 김광일은 분명 이채로운 사람이다. 그의 맛깔스런 문장은 무엇보다 철저한 텍스트 분석에서 발원된 듯하다.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한 기사를 묶어 펴낸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이가서)의 서문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들인 책읽기'를 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김광일은 일주일에 2권 이상의 소설과 1권 이상의 시집을 밑줄 쳐가며, 거기다 메모까지 하며 읽는다. 메모장은 잠자리에서도 그와 동침하는데 꿈을 꾸다 일어나 불현듯 떠오른 문장을 받아 적은 경우도 숱하단다. 이쯤 되니 그에게 책이란 '즐거운 읽기'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난해한 분석의 대상'에 가깝다.

김광일에게 책읽기란 누림이 아닌 의무...


누림이 아닌 의무로서의 독서. 괴로울 법도 하다. 그러나, 천만에. 김광일은 그 괴로움을 기꺼이 즐긴다. 그것이 문학기자의 업이라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또한 감성보다는 이성의 편에 서서 기사를 쓰는 김광일의 문장을 이해하는 한 단초가 되기도 한다.

책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소중함을 알기에 '대충 쓴 문학기사'를 독자들에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자존심과 고집스러움. 어찌 보면 오만하게 보일 수도 있는 김광일의 자긍과 자부(自負)야말로 그의 기사에 누구도 쉬이 범접할 수 없는 특유의 맛을 배어들게 한 힘이 아닐지.


바로 그 힘을 바탕으로 한수산과 미셀 투르니에의 소설을 넘나들고, 고은과 이성복의 시를 해석하며, 수잔 손탁과 최인석 문장의 키워드를 판독해내는 김광일.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는 2003년 한해 동안 그가 만난 책들을 최고의 '글맛'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눈물어린 기록에 다름 아니다.

바로 그 책이 세상의 빛을 본 지난 주 금요일. 인사동 한 음식점엔 앞서 언급한 정철훈, 조용호 등이 모여 김광일의 출간을 빙자해 가는 봄을 아쉬워하며 낮술을 마셨다. 곁에서 함께 술잔 들었다놓기를 반복하던 기자는 술이 아니라 그들이 들려주는 문학의 '향기'와 '맛'에 대취했다. 그러고는 '언제가 되면 나도 저들처럼 향기롭고 맛있는 기사를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홀로 슬퍼졌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김광일의 문장 한 대목을 흉내내볼까.

"아직도 문학의 위대함을 믿는 사람, 그 위대함이 세상과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신뢰를 버리지 않은 이들에게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를 권한다."

책을 읽은 다음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김광일 지음,
이가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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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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