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체독촉장 아닌 따뜻한 편지 전하고파"

[미담] 마산우체국 사랑의 집배원 이용재씨

등록 2004.06.16 19:24수정 2004.06.19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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뙤약볕 아래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이용재 집배원. ⓒ 김호경

"불경기로 반가운 소식보다는 법원의 압류 통보서나 연체 독촉장이 부쩍 많아 안타깝습니다."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편지 한통에 울고 웃던 때가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미지의 연인들이 이름과 주소만으로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동원한 연서, 군에 간 아들 녀석이 쏟아지는 졸음을 참으면서 쓴 '부모님 전상서', 열사의 땅 중동에서 비지땀을 흘리던 근로자들의 애환이 담긴 애틋한 사연들.

언제부터인가 인터넷 등 첨단 통신 기술의 등장으로 웃음과 눈물이 흠뻑 배어 있던 편지 대신 각종 요금 청구서와 홍보물만이 우편함을 차지해 버렸다.

그런데 지난 10일경 마산시 양덕동 일대 주택과 사무실 우편함에는 정체 불명의 편지 한통이 들어 있었다. 발신자는 '마산우체국 집배원 이용재', 받는 이는 '고객님'.

"우체국에 대금 연체된 것도 없을 텐데…." 가뜩이나 더운 날씨라 투덜대며 봉투를 열었다. 순간 신선한 충격과 잔잔한 감동이 작은 봉투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6월은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오가는 고객님들의 우편물에도 오가는 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우편물을 받으실 때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요. 있었다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초여름 불볕 더위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깊은 산속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원한 폭포수를 맞은 듯, 상쾌함을 느꼈다. 우편물을 배달만 하던 배달부에게서 받은 편지. 실로 십수 년 만에 받아 보는 사람 냄새가 흠씬 풍겨나는 편지였다.

이 편지를 보낸 주인공은 올해로 집배원 1년 6개월째를 맞는 마산우체국 소속 집배원 이용재(33)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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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 집배원은 만나는 고객마다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 김호경

공과금 고지서 대신 집배원의 편지가

"각종 공과금이나 물건 대금 납부 고지서가 아닌 편지 한 장 받기 힘든 시대에 집배원님의 편지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한 여자중학생)

"집배원님의 글을 읽고 몇 년 동안 한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는데, 오늘 저녁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50대 남성))

이씨의 편지를 받은 고객들은 한결 같이 "신선하고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며 마산우체국으로 전화를 걸어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 때문에 한때 우체국 사무실에는 전화 벨 소리로 가득했을 정도라고 한다. 섭씨 30도를 웟도는 한낮의 기온에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아스팔트 사이를 오가며 고단한 하루를 보내고 있는 그가 편지를 보낸 사연은 간단했다.

"날마다 만나는 고객분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보냈습니다."

그의 배달 구역은 양덕2동으로 마산시에서 2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하루 배달하는 편지는 대략 2500여 통. 6시간을 소변 볼 시간도 없이 달려야 한다. 배달을 마쳤다고 그의 일과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전달하지 못한 등기 우편물과 다음날 배달한 우편물을 분류해야 한다. 하루 꼬박 12시간 정도를 우편물과 씨름해야 하는 중노동이다.

"저는 정규직이 아니라 상시직으로 월 수입은 140만원 정도 됩니다. 처음엔 안정적인 직업이라 선택했는데 하다 보니 나름대로 사명의식이 없이는 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이처럼 중노동에 시달리고도 받는 보수는 연봉 2~3천만원하는 대기업 근로자 수준에 휠씬 못 미친다. 그가 집배원 일을 시작한 것은 불과 1년 6개월전. 집배원 일은 고향인 산청군에서 8년 동안 평범한 직장 생활을 해 오다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어 선택하게 됐다.

매일 편지 전하는 고객들의 건강이 최우선

사실 집배원이라는 직업이 안정적이기는 하지만,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하루 종일 대·소형 차량들의 살인적인 질주가 펼쳐지는 도로 위에서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일 반가운 얼굴로 대해 주시던 고객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그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고객님들이 건강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용재 집배원의 소망은 매일 얼굴을 대하는 고객님들의 얼굴을 언제나 뵐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의 삶의 현장인 아스팔트 위에서 가진 '짧지만 의미있는 3분여간의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그의 애마 '시티100'오토바이는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반가운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한시라도 빨리,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서이리라.

요즘 사람들은 바로 옆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옆집의 이웃이 죽은 지 몇 달이 지나도 관심조차 없다. 이처럼 야박한 이웃 인심 속에 사람 사는 맛을 잃어가는 우리에게 그가 보낸 한 장의 편지는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하다"는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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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재씨가 보낸 편지. ⓒ 김호경

다음은 이용재씨의 편지 전문이다.

한 장의 소중한 편지를 기다리는 고객님께.

안녕하십니까? 저는 고객님댁의 우편물 배달을 책임지고 있는 마산우체국 집배원 이용재입니다.

매일 고객님께 도착한 우편물을 전해만 드리다가 제가 직접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약간 어색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네요. 6월은 고마운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고객님들의 우편물에도 오가는 정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동안 우편물을 받으실 때 불편한 점은 없으셨습니까? 있으셨다면 너그러이 이해하여 주시고, 고객님의 우편물을 더 소중히, 그리고 신속하게 배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더욱 성실히 근무하여 고객님과의 약속을 꼭 지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우체국을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며 언제나 건강하시고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2004년 6월 마산우체국 집배원 이용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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