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나에게 되돌아오는 악행의 참회록 '올드보이'

04.06.23 18:37최종업데이트04.06.2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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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안내] 이 글에는 영화 <올드보이>의 줄거리와 결말이 상당 부분 드러나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의 경우 향후 영화 감상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편집자 주>


"모래알이든 바윗덩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숨죽이며 영화를 지켜보는 내내 난, 잊고 지낸 내 삶에 대해 통째로 복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눈앞에 진행되는 이야기와 함께 교차 편집되는 내 머리 속 필름들은 혹시나 나도 누군가에게 사소한 일이라도 상처 준 일은 없는지 꼼꼼하게 되짚어 보도록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끔찍한 복수로 이어지는 결말이 지나고 난 뒤 극장을 나설 때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은닉해온 죄에 대한 불안이 내게 엄습해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모래알이든 바윗덩이든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는 지독하리만치 냉정한 명제는 적지 않은 생을 살아오면서 저지른, 나만이 알고 있는 업보들의 자기합리화를 여지없이 깨버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유가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사소하게 던진 말 한 마디에 상처를 입은 채 평생 나를 증오하고 있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인 오대수(최민식 분)가 자신의 이름을 설명하듯, 나는 대부분의 나날들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지는 않았는지 벌써부터 두려워졌다.

복수는 나의 힘…욕망의 허무한 순환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오대수는 이유도 모른 채 15년간 감금돼 있으면서 "누가 왜 가뒀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되돌아본다. 그리곤 자신이 저지른 모든 악행들을 적어 내려간다. 누군가와 싸웠던 일, 누군가에게 상처 줬던 일. 악행의 자서전이자 자신의 옥중일기인 이 참회록은 실제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에게 똑같은 자서전을 쓰도록 강요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 설정하고 있는 오대수의 죄는 또 다른 주인공인 이우진(유지태 분)이 누나하고 사랑하는 관계라는 사실을 친구에게 전달한 것이다. 교실에서 우연히 목격한 근친상간에 대한 관음증적 욕망이 그대로 친구에게 전해지고, 성이 억압된 공간인 고등학교를 통해 왜곡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과정을 통해 이우진은 결국 누나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목도하게 된다.

오대수가 이우진의 누나인 이수아(윤진서 분)에 대해 친구들에게 묻는 과정에서 이구동성으로 이수아가 남자들과 쉽게 잠을 자는 '걸레'였다고 기억하는 대목은 정말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우리가 지나온 학창시절을 되돌아볼 때 이유 없이 떠도는 소문만 듣고 '걸레'라고 단정한 여자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실제로 말 한 마디 나눠본 적 없고 그저 지나가는 말로 들은 소문일 뿐인데 마치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친구들에게 그 추문들을 옮기고 흥미로워하며 때론 즐거워하고, 입에서 입으로 저지른 폭력들. 소문의 당사자인 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렇게 우연히 내가 상처를 준 사람들의 명단들이 뇌리 속에 떠나지 않고 또렷하게 기억되는 고통에 시달렸다. 오대수가 PC방 주인인 친구에게 이수아에 대해 물어볼 때 그 친구가 '걸레'라고 말하자 바로 그 앞에서 엿듣고 있던 이우진이 친구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에서 난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누군가 나를 향해 내리꽂는 칼날들이 여기저기서 조여오는 느낌들 때문에.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증오들을 지었으니 어리석게도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분노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온통 복수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오대수를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복수를 하지 못했노라"

-'복수는 나의 힘-이우진의 독백' (기형도의 '질투는 나의 힘'을 필자가 변용한 것임)


오대수의 말은 우리가 흔히 학창시절에 친구들끼리 웃으며 던지던 농담에 지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는 누나의 죽음을 부르고 한 인간의 삶을 황폐화시킨 계기가 돼버렸다.

중국 베이징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다음 달 미국 뉴욕에서 폭풍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나비효과 이론처럼. 그렇게 '올드보이'는 무심코 지나간 생에 대한 반추를 통해 지독한 인과응보의 법칙을 각인시킨다.

그런데 이쯤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얘기해보자. 누이와의 관계가 알려지면서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누이의 죽음 때문에 자신으로부터도 버려진 이우진. 자신의 불행한 운명의 원인으로 지목된 오대수에 대한 복수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귀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짝패와 같은 운명에 놓인 오대수에게 이우진은 이렇게 말한다.

"상처받은 사람에게 복수심만큼 좋은 것이 없다. 고로 복수심은 건강에 좋다"면서 "그런데 복수가 다 이뤄지고 나면 어떨까. 숨어 있던 고통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라고.

결국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안겨준 순간 자살하고 만다. 복수라는 것이 인간 욕망의 한 단편이고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복수를 낳는 허무한 순환의 구조를 갖고 있음을 인식하게 해준다. 그리고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도 살 권리는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지극히 진부한 삶의 진리를 던지면서 나약하게 인간의 운명을 감싼다.

과잉현실…욕망의 자기반영 자기복제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현실은 장 보드리야르가 말한 '원형이나 실재 없이 실재적인 것들의 모형들에 의해 만들어진 과잉 현실' 즉 '시뮬라시옹'의 세계에 가깝다. 영화 속에 등장하고 있는 인물들은 감독이 얘기하고자 하는 '복수심과 같은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허무'를 표현하기 위한 기호들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작인 '복수는 나의 것'으로부터 시작해 '올드보이'를 경유한 후 또 다른 복수의 마지막 작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박찬욱 감독이 만드는 '복수 3부작'은 형식이라는 옷만 갈아입은 똑같은 얘기의 반복일 뿐이다.

"사랑은 자기반영과 자기복제. 입은 비뚤어져도 바로 말하자. 내가 너를 통해 사랑하는 건 내가 이미 알았고, 사랑했던 것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서, 시든 꽃과 딱딱한 빵과 더렵혀진 눈(雪)을 사랑할 수는 없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서, 썩어 가는 비린내와 섬뜩한 청거북의 모가지를 사랑할 수 없다.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만 사랑할 뿐,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아장거리는 애기 청거북의 모가지가 제 어미에게 얼마나 예쁜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이성복, '사랑은 사랑만을 사랑할 뿐' 중에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다 같다. 사랑이나 복수나 모두 자기반영이고 자기복제일 뿐. '올드보이' 속에서 보면 크게 이우진과 오대수의 쌍방향 복수를 축으로 등장인물들간에도 복수의 역학관계가 자잘하게 내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복수도 승자가 있지 않으며 복수가 끝나는 순간 새로운 복수가 예비돼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복수는 끝나지 않고 자기반영과 복제를 통해 재생산된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은 그런 것이다. 끝이 나지 않은 욕망을 위해 우리들은 싸우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살인한다. '올드보이'는 복수를 매개로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현실에서 보여주는 메타시선, 즉 '일장춘몽'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감독은 너무나 진부한 근친상간과 인과응보(오대수가 혀를 잘라내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에 관한 신화들을 현대적인 공간에 풀어놓으면서 "이게 현실이다"고 은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말하는 근친상간이라는 코드는 이 영화에 있어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인상 깊은 수단일 뿐, 아니면 흥행에 대한 감독의 강박관념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최면과 도청을 통해 오대수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는 이우진은 설사 미도(강혜정 분)가 진짜 딸이 아니라고 해도 가족 앨범과 같은 몇 가지 도구와 반복된 쇠뇌 과정을 통해 그것을 믿도록 만들 수 있다.

"인간은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거야. 상상하지 않으면 용감해질 수 있을 텐데."

오대수는 상상이라는 연상 작용을 통해 관념 속에서 미도를 자신의 딸로 인지하게 되고 진실과는 무관하게 관념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결국 '올드보이'에 나타나는 현실들은 각종 상징적 기호들이 부유하는 과잉현실일 뿐이다.

이러한 신화 같은 세계에서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잠언들이 규칙을 만들고 플롯을 전개시키는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듯이, 새가 그물을 벗어나듯이 스스로를 구원하라",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등과 같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격언들은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한 암시가 되거나 자신이 놓여 있는 상황을 극복하는 단초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영화 곳곳에서 우리는 등장인물 뿐만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는 공간들이 실재하지 않는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금지된 욕망…남성판타지의 연장

'올드보이'를 보다보면 갑자기 숨이 턱하고 막히는 순간이 있다. 이우진이 자신의 누나인 이수아와 과학실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을 오대수가 몰래 지켜보는 장면. 보통의 성인영화에서 등장하는 노골적인 남녀의 정사가 아님에도 충분히 시각적 쾌락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 장면에서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성에 대한 관습적인 시선에 놀라게 된다. 지금도 함께 이 영화를 보던 여자친구가 하던 말이 생생하다. "하여튼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는 10대나 60대나 다 똑같다니까."

"<올드보이>를 뒤덮는 저 끔찍한 거세의 이미지들. 칼을 가지고 다니며 칼을 다루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무용지물인 여자. 미도는 천사로 상징되고, 야수는 미녀를 지키는 것에 자신의 혀를 건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여자들은 늘 창녀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세상에서 여자들은 늘 천사다. 그러나 기억하라. 여자들을 그 무릎으로 기억하는 오대수여. 여자들은 다 다른 무릎을 지녔다. 기억하라 손이 더워서 스시를 만들 수 없다고 믿는 감독이여. 여자들의 영혼이 더워, 누구든 포를 뜰 순 없다고 믿는다면, 그건 정말 착각이다."

-심영섭, '<올드보이>의 구약적 응징론에 대한 신약적 비판론' 중에서


'올드보이'에 등장하고 있는 여성 캐릭터들은 감독의 상상 속에서 창조된 여성이지 우리가 함께 밥을 먹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하는 일상 생활 속에 여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생면부지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미도, 동생을 사랑하는 수아는 남성의 욕망을 받아주고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여자들이다.

농담 같지만 미도와 수아의 캐릭터는 남성으로 환치된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캐릭터들이다. 그렇게 된다면 '올드보이'라는 영화는 근친상간이 아닌 동성애(호모)를 다룬 영화로 더욱 충격적인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특히 최면술사로 나오는 캐릭터는 여자 배우가 연기했을 뿐 여성이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중성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이 같은 이유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작위적이며 감독의 철저한 계산 속에 배치된 기호 중에 하나라는 인상이 강하다.

늙은 소년의 자아찾기 투쟁…또 다른 시선

위베르스펠드의 행위소 모형을 통해 '올드보이'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우선 오대수를 주체로 할 경우 이유도 모른 채 15년 동안 감금된 사실(발신자)이 자신을 가둔 자에 대한 복수(대상)를 불러오고 이를 방해하는 이우진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오대수의 복수심을 더욱 부추기는 반대자이자 발신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에 미도와 대수의 친구들, 그리고 우진까지 대수의 목적인 복수를 돕는 조력자로 나오게 된다.

또 우진을 주체로 한다면 자신이 사랑한 누이인 수아의 죽음(발신자)이 대수에 대한 복수(대상)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며 여기서 대수도 우진의 복수에 대항하는 반대자이자 발신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고, 최면술사나 우진의 경호실장과 같은 조력자로서 역할도 함께 수행한다.

이 행위소 모형을 통해 두드러지게 드러난 특징을 본다면 대수와 우진의 캐릭터가 영화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올드보이'는 대수와 우진의 복수를 중심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자세히 보면 대수와 우진을 제외한 인물들의 경우 미도를 포함해서 두 주인공의 복수를 돕기 위한 조력자의 역할 이상의 어떤 주체적인 행위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체가 대상을 달성한 후, 즉 대수나 우진이 상대방에 대해 복수를 한 후 얻게 되는 수혜자는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수는 자신을 가둔 자와 이유에 대해 밝혀내고 대수가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진이 자살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으나 대수에게 남은 것은 잘려진 혀와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악행들, 그리고 딸과의 근친상간 사실에 대한 인식뿐이다.

우진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사랑한 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대수를 15년간 감금하고 자신과 똑같은 고통을 느끼도록 대수가 자신의 딸과 근친상간을 하도록 했으나 결국 누이의 죽음에 대한 자기 연민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

이 같은 행위소 모형은 결국 영화 전반을 이끌고 가는 '복수'라는 인간의 욕망도 그 끝에는 아무런 수혜자도 없고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 허무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여기에 의미를 좀더 확장하면 복수로 은유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들, 예를 들어 성욕이나 지식욕, 명예욕 등의 추구도 허무한 것이라는 확장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근친상간이나 복수 등은 인간의 근원적 욕망에 대한 탐구를 위해 선택된 수단이며, 대수와 우진을 제외한 인물들도 감독에 의한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며 주인공의 대결구도도 퀴어영화에서 동성애자들끼리 사랑을 위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묘사된다 해도 의미 전달이 아무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의 징후적 의미이다. 대수와 우진의 복수 구도 속에서 감독이 말하려고 했던 심층적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영화의 뼈대는 다른 어떤 줄거리를 대체해도 변하지 않는다. 근데 하필 왜 대수와 우진의 복수 구도인가.

영화 속에서 우진은 대수의 모든 삶을 통제하는 아버지(신) 같은 존재로 묘사돼 있다. 대수는 15년간 감금 후 세상에 나온, 우진이 최면을 통해 통제하는 대로 삶을 다시 복습하게 늙은 소년일 뿐이다.

미도를 비롯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의 역할을 보면 이런 구도가 더욱 명확해진다. 미도와 최면술사는 우진의 복수를 실현하는데 도움을 주는 조력자(아버지를 도와 자식을 키우는 어머니처럼)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미도는 표면적으로 대수의 복수를 돕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우진의 복수를 실현하는 '화룡정점'의 마지막 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아는 어떤가. 미숙한 남성이 주체적인 남성성을 획득하기 이전에 느끼는 성애의 대상일 뿐이다(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런 분석을 통해 '오대수'의 투쟁은 복수라는 은유를 뒤집어 쓴 채 '남성다움(남성성)'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려는 음모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로 대변되는 우진은 일종의 조직원으로서 대수에게 남성이라는 안락한 존재 의미를 부여해주지만 잔혹한 복종을 명령한다.

대수는 이 과정에서 우진(아버지)을 죽이고 또 다른 아버지(독립적인 자아)가 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므로 영화는 진행형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의미가 바로 들어오지 않고 무엇을 얘기하려고 하는지 모르게 산만하게 다가오는 것은 이러한 구조에 연유한 바가 크다.

결국 감독은 독립된 자아를 찾기 위해 오늘도 투쟁하고 있는 이 땅의 피비린내 나는 남성들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부터 결론이 나지 않은 얘기를 현란한 카메라 워크와 화려한 시각적 치장, 감성을 뒤흔드는 음악까지 감독의 쉼 없는 스타일과 시종일관 관객을 압도하는 주인공의 카리스마로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드보이'는 "늙은 소년의 자아찾기 투쟁"을 감독의 현란한 스타일로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004-06-23 21:1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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