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새겨진 기억은 강렬하다

요시모토 바나나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등록 2004.06.25 01:36수정 2004.06.25 17:38
0
원고료로 응원
a

ⓒ 민음사

1960년대 제2차 여성해방운동을 확산시킨 결정적인 문구는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였다.

여성들의 경험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하는 특수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정치는 보다 공적이고 남성적인 영역으로만 여겨왔던 당시 상황에서 여성 스스로의 경험을 공론화할 수 있다는 희망은 여성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기 충분했다.


여성에게는 힘을 주었던 페미니즘의 저 문구는 정작 여성의 영역을 사적인 곳으로만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예로 현대를 사는 여성작가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일차적이고 피상적인 비난은 개인적인 이야기에만 천착한다는 것이다.

남성작가들에 비해 시대정신이 뒤떨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사적이어서 가벼운 주제를 다루기 때문에 종종 그녀들의 소설은 흥미 위주의 글 혹은 너무도 개인적이어서 판독하기 난해한 글로 읽힌다. 자전적 글쓰기 혹은 성장소설적 양상을 띠는 여성작가의 글들은 구체적인 목적조차 없는 것으로 폄하된다.

최근 몸에 새겨진 기억들에 관한 짧은 글들을 모은 단편집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를 출판한 요시모토 바나나 역시 그런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 <키친>으로 이미 확고한 대중적 기반을 획득한 그녀에게는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작가적 재량과 더불어 적당히 세련된 감성으로 상품이 될 만한 글을 쓰는 상업주의의 냄새가 난다.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 등의 일본 여성 작가들이 유독 한국의 서점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은 여성운동의 '사적인 것의 정치화'가 성공했다거나 여성작가들의 여성성이 부각되기 때문은 아니다.

90년대 초반 무라카미 하루키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이후로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를 다루는 소설이 이미 원자화된 각 개인들의 감수성을 건드린다는 것을 출판사도 작가도 독자도 알기 때문이다. 어렵고 따분한 것을 싫어하는 풍토와도 물론 연관은 있다.


여성성, 남성성을 확연하게 구분짓고 그에 따라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평가하는 일은 그다지 정당하다 여겨지지 않지만,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을 읽다보면 그런 개인적인 윤리체계에 슬쩍 의문이 든다.

비단 바나나의 경우에 국한되지만은 않겠지만, 단편집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에 등장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랄지(보트) 여성의 몸에 새겨진 작은 혹(조그만 물고기)에 대한 묘사는 남성작가였다면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에서 우리의 몸은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곳엔 식물을 사랑하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서 알로에의 몸에 새겨진 상처를 공유하려는 한 여자(초록반지)가 있고, 잠시 눈을 감았을 뿐인데 최면에 걸려 헤어진 친엄마를 기억해내 온몸으로 우는 한 여자가 있다.

늘 한 사랑에 휘둘리듯 사는 여자는 뱃속에 생명이 있음을 주체적인 몸으로 감각하고(지는 해), 가슴 가운데 물고기 모양의 혹을 수술로 제거한 여자는 마치 헤어져버린 연인처럼 그를 그리워한다(조그만 물고기).

<근대, 여성이 가지 않은 길>에서 소설가 최윤은 여성소설의 주제가 자전적이고 일상적일 수밖에 없는 까닭은 공적인 시간의 기획된 전개에서 여성은 소외되어 왔고, 따라서 자신에게 익숙한 현실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아직도 개인적인 것을 비정치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가치가 낮은 것으로 평가하는 의식 혹은 무의식이다. 그런 측면에서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재에 대한 시비는 무의미할 수 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 삶에 조금이라도 구원을 주는 것'이 문학일테니.

그 기억이 행해진 곳에서 떠난지 한참이 되어도, 사람은 사라지고 풍경만 남게 되어도 몸에 대한 기억은 그 느낌이 매우 강렬하다. 그건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민음사, 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3. 3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4. 4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5. 5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