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노래자랑 망신 콘서트로 만회하다

형이 마흔 셋에 첫 콘서트를 열었던 또 다른 사연

등록 2004.07.28 15:09수정 2005.08.16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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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셋 나이에 처음으로 가진 형님의 단독콘서트가 지난 4월 만족스럽게 잘 끝났습니다. 직접 가볼 수는 없었지만 콘서트에 참석했던 몇몇 분이 형의 인터넷사이트에 올려놓은 글들을 통해 제법 괜찮았던 콘서트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문가의 눈에도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콘서트를 함께 준비했던 분들로부터 음반을 내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인터넷사이트에 글을 올린 분 가운데 '지금까지 그런 끼를 묻어놓고 어떻게 살았냐'고 이야기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마음속의 아픔을 딛고 일어서 지난 시절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 형이 콘서트를 계획했던 이유였지만, 형에게는 저도 나중에야 알게 된, 지금까지 생각만 품고 있다가 이제야 나섰던 또 다른 ’사연’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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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열창하고 있는 형(무대 가운데)

열창하고 있는 형(무대 가운데) ⓒ 강구원


작년 가을 무렵 저녁 식탁에서 형수님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혜송 아빠, 다음 주 일요일에 아파트 단지 내 광장에서 노래자랑대회가 있대. 자기 한번 나가봐."


명색이 가수였던 형은 약간 자존심이 상해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초대가수로 불러주면 나갈께…."


형이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형이 한때 노래를 불렀던 이력을 알고 있는 형의 친구가 살고 있는데, 형수님은 다음날 그 분의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후 관리사무실에 들렀습니다.

그날 밤 형수님은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야, 자기를 초대가수로 부르겠대. 연습 좀 해서 아파트 단지 내에 소문 한번 확 내버리자.”

옆에 있던 조카 혜송이도 덩달아 신이 났습니다.

"와 신난다. 친구들 다 불러야지."

그날부터 형수님은 무대 의상, 곡목을 고르며 형의 노래자랑 무대를 준비했고 형은 그저 무표정하게 형수님을 쳐다봤습니다.

a 아빠의 공연에 우정출연해 ‘마법의 성’을 예쁘게 부른 조카 혜송

아빠의 공연에 우정출연해 ‘마법의 성’을 예쁘게 부른 조카 혜송 ⓒ 강구원

마침내 그날이 왔습니다.

형은 잠시 외출했다가 저녁 6시쯤 돌아왔고 8시경에 무대에 오르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7시쯤부터 바깥이 시끌시끌해지면서 사회를 맡은 개그맨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형수님과 조카 혜송이는 먼저 밖으로 나갔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뒤 거실에 앉아 형은 이런 저런 옛 생각에 잠겼습니다.

12년 전 아주 잠시 활동을 할 때였습니다. 무대에 오르기 전 매니저는 형에게 소주 한 병을 건네주곤 했습니다. 감정(feel)이 팍팍 살아야 한다면서…. 그때 형은 긴장해소도 할 겸 소주 한 병을 단숨에 들이키곤 했습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형은 준비한 소주 한 병을 가볍게 해치웠습니다. 술이 들어가니 목이 탔습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보니 반쯤 남은 포도주가 보였습니다. 형은 그것을 들고 방에 들어와 또 마셨습니다.

”안돼….”

형의 나이는 어느새 이 정도를 감당할 체력이 아니었습니다. 무대에 오르고 난 이후부터의 형의 기억은 가물가물 합니다.

비틀거리며 무대에 올라간 형은 준비한 곡들 중 한 곡을 엉터리로 부르고 나서 진행요원의 부축을 받으며 무대를 내려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형수님이 말했습니다.

"혜송 아빠, 우리 이사갈 준비하자."

형이 목숨처럼 아끼는 조카 혜송이는 형과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잔뜩 풀이 죽은 모습으로 학교에 갔습니다.

출근길에 마주친 경비원 아저씨는 형을 보자 아무말 없이 씨익 웃음을 던졌습니다. 형은 순간적으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엉거주춤 고개를 숙이면서 얼른 시선을 피했습니다.

40여년을 살면서 망신도 이런 망신은 정말 형에게 처음이었습니다.

"신이시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답답한 마음에 위로가 될까 해서 몇몇 사람에게 전화를 돌렸지만 아무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음악을 하는 후배, 친구들 모두 낄낄거리며 웃기만 할 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조카 혜송이가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빠! 친구들이 그날 아빠가 아주 이상했대."

이 한마디에 형은 다시 한 번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라고 믿고 있는 사랑하는 딸과 아내에게 작은 추억거리를 만들어 주려고 올라갔던 동네 노래자랑 무대에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일은 형수님과 조카 혜송이에게 적지 않게 충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아!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형은 생각을 거듭했고, 고민 끝에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내의 말대로 이사를 가는 방법과, 그리고 또 한가지…. 다시 한 번 무대에 올라가 멋지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형은 후자를 택했고 일전에 통화했던 음악을 하는 후배에게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아, 나 공연 한번 해야겠다."

그렇게 다소 엉뚱하게 공연은 계획되었고 몇몇 사람의 강력한 권유에 따라 형은 카페의 간이무대가 아닌 전문 공연장의 정식 무대를 ‘재기’의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a 가끔 이런 저런 행사의 사회를 보기도 했던, 무대가 그리 낯설지 않은 형이었지만 동네노래자랑 사건 이후 형수님은 내심 걱정하셨다.

가끔 이런 저런 행사의 사회를 보기도 했던, 무대가 그리 낯설지 않은 형이었지만 동네노래자랑 사건 이후 형수님은 내심 걱정하셨다. ⓒ 한태동

‘관객이 얼마 되지 않는 썰렁한 공연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을 비웃듯 공연장을 가득 채운 400여명의 관객 앞에서 형은 동네 노래자랑에서의 망신을 확실하게 만회했습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공연을 도왔던 분들과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로 콘서트에서 처음 선보였던 신곡 몇 곡을 정식으로 녹음했습니다.

아빠의 공연에 우정출연한 올해 아홉살인 조카 혜송이도 별로 긴장하지 않고 ‘마법의 성’을 멋지게 불러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잠재력을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형의 단독무대 이후 형수님과 조카 혜송이가 무척 행복해하고 있고 형도 전과 다르게 의욕이 넘치는 삶을 살고 있어서 더없이 기쁜 마음입니다.

마흔을 넘긴 나이지만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형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저에게도 참 행복한 일이고요.

형의 생각대로 욕심 없이 천천히 즐기면서 해나가는 형의 새로운 음악활동이 형을 지켜보는 분들, 그리고 늘 찌뿌드드한 기분으로 살아갈지 모르는 형 또래의 모든 분들께 작은 활력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형님의 멋진 모습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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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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