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로만 상상했을법한 기상천외한 상상력

이토준지의 신작 <어둠의 목소리> <미미의 괴담>

등록 2004.08.09 15:00수정 2004.08.09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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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둠의 목소리

어둠의 목소리

99년 처음으로 이토준지의 컬렉션이 국내에 선을 보인지 5년의 세월이 지났다. 컬렉션의 완간 이후 <소용돌이 1,2,3> 그리고 <토미에 어게인> 이 선보였고, 2년 후에는 <공포의 물고기> 가, 그리고 다시 2년후인 금번에 두편의 신간이 '스페셜 호러' 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것이다.

이토준지의 기괴한 작품 세계는 이미 많은 고정팬들을 거느리고 있으며, 호러만화라는 마이너한 장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번에 걸쳐 영화화 되는 등의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기도 하다.


사람들은 이토준지 작품들의 어떤면에서 매력을 느끼는 것일까. 그의 작품들이 제도권의 '청소년 필독서' 리스트에 오르지는 못하겠지만, 단순히 '엽기코드' 라는 단선적인 평가로 절하시키는 것이 '범죄' 와 다를바 없다는 사실에는 그의 독자라면 누구든지 이견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토준지 만화의 가장 큰 매력은 무한한 상상력에 있다. 단지 머릿속으로만 상상했을법한 기상천외한 (혹은 끔찍한) 장면들이 이토준지의 유려한 그림체로 시각화될때, 사람들은 충격에 가까운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수많은 이들에게 신비한 영감을 불어넣어준 질퍽한 비주얼들은 대부분 평범한 일상속에 스며들어온 '외부인' (비정상적인 이웃, 괴생물체, 혹은 유령) 에 대한 공포나, 수상한 공동체에 편입된 타자가 겪는 이질감, 혹은 초자연현상에 대해 다루는데 이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추악한 인간의 본성' 을 드러내기 위한 장르적 장치들에 불과하다.

갖가지 악취미들로 무장한 기괴한 판타지가 끊임없이 구축되는 동안, 필연적으로 현실과의 접점을 만나게 되는 독자들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기겁한다. 그리고 이토준지는 그러한 독자들을 바라보며 입안에 못을 가득 물고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 혹시 지금 '소이치'를 연상하고 있는가? 빙고. (소이치야 말로 이토준지가 탄생시킨 진정한 그의 페르소나이다.)

<어둠의 목소리> 는 이토준지의 단편들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총 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 이 작품은 다소 김빠진 듯했던 전작 <공포의 물고기> 와는 달리, 예전의 상상력과 악취미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그 중 '속박인' 과 '글리세리드' 는 이 컴필레이션의 베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이토준지의 가장 역겨운 이미지 리스트에 당당히 오를 '글리세리드' 와 인간의 추악한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속박인'은 이토준지 미학의 절정을 보여주는,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토준지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다소 힘이 빠지는 결말들이 전혀 흠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내용 전개와 흉악한 악취미들은 깊은 여운을 자아낸다.


특히 <어둠의 목소리> 가 선사하는 유쾌한 농담 '도깨비집의 비밀' 에서는 스스로의 작품을 패러디하고 재구성하는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도깨비집의 비밀'은 이토준지의 유력한 캐릭터들 중 하나인 '소이치' 와 '패션모델' 이 함께 등장하여 벌이는 기상천외한 이야기이다. '소이치' 시리즈의 사실상의 끝을 의미하는 듯하여 씁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재기발랄한 작품임은 틀림없다.

a 미미의 괴담

미미의 괴담

반면 <미미의 괴담> 은 기존의 '토미에' 나 '소이치' 시리즈 처럼 '미미' 라는 캐릭터가 일관적으로 등장하며, 그녀 주위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사건들을 들려주고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작품은 그야말로 '괴담' 에나 어울릴만한 밋밋하고 힘빠지는 내용 전개를 보여주며 과거의 작품들과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것은 <미미의 괴담> 이 일본의 유명한 괴담집인 <괴담신이대>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thering 님 정보 참조) 이토준지의 상상력이 거세된데 따르는 결과는 실로 참혹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단순히 '잔혹한 그림책' 이 아니라, 실로 고뇌어린 작가주의의 산물들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듯 하다.

모처럼 등장한 이토준지의 신작 두권이 서로 매우 상이한 수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은 여전히 유효하다. 부디 한국 만화판도 독자들과 출판계의 꾸준한 개혁과 인식 변화를 통해 '시스템 차원' 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해결되서, 곳곳에 숨어있을 제 2의 이토준지들이 등장해주기를 손꼽아 기대해본다.

어둠의 목소리

이토 준지 지음,
시공사(만화),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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