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흔들림. 그리고 집착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는 저녁>

등록 2004.08.11 21:32수정 2004.08.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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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에쿠니 가오리는 언제나 같은 힘을 지니고 있다. 수채화처럼 맑고 청명하면서도 그 속에 사랑의 아픔을 담아내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식상하다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낙하는 저녁> 작품을 보면 그녀의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무리 식상하게 여길 만한 내용일지라도 그녀의 표현은 언제나 변화하며 언제나 그렇듯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덮을 수 없는 마력이 있다. 또 다 읽고 난 뒤에도 한참이나 그 슬픔을 잊기 어렵게 만든다.


사랑의 상처와 흔들림 그리고 서서히 집착으로 변질되는 사랑을 담담하게 풀어나간 <낙하하는 저녁>은 서른 두 살 미술학원 강사 리케가 8년 동안 동거한 럭비선수 출신 다케오와 헤어지면서 겪는 심정을 15개월 동안 묘사하고 있다. 다케오가 리케를 떠난 이유는 새로 사귄 하나코라는 여자 때문이다.

이 소설의 실제 주인공인 하나코는 '다른 사랑을 파괴하면서까지 사랑을 이끄는 흡인력'이 있는 여인인데, 막상 자신은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고 소망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녀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비극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만다. 그녀의 안개 같은 마력에 빠진 리케는 애인을 앗아간 하나코와 한집에서 살게 된다.

보통 사람은 쉽게 납득하지 못할 이상한 동거다. 남자관계가 복잡한 하나코지만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은 하나코의 존재를 소유할 수 없다. 아니, 그 존재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이야기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독자들을 흡입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다소 과장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사랑에 대한 집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잘 그려내고 있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케오가 나간 후에도 울부짖지 않았다. 일도 쉬지 않았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살이 찌지도 야위지도 않았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긴 시간 수다를 떨지도 않았다. 무서웠던 것이다. 그 중 어느 한가지라도 해버리면 헤어짐이 현실로 정착해버린다. 앞으로의 인생을, 내내 다케오 없이 혼자 살아가야 하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대청소. 딱히 다케오의 흔적을 없애버리기 위한 것도 마음의 정리를 위한 것도 아니엇다. 실제로 다케오가 남기고 간 책 몇 권과 CD, 그가 사용하던 그릇들은 모두 원래 자리에 놓여 있다. 뿐만 아니다.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고 떼를 써서 얻은 초콜릿색 울 재킷 역시, 아직도 다케오가 여기에 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옷걸이에 걸려 벽을 장식하고 있다.


어제 걸려온 전화에서 다케오는, 회사에서 사무실 이동이 있어 내일은 대청소야, 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도 하고 싶었다. 다케오가 대청소를 하는 같은 시간에 나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 오전 중에는 일을 쉬고, 대청소를 하고 있다. 아파트먼트를 노래하면서. 알고 있다. 이 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길이 아니면 다케오와 닿을 수 없다. (16~17쪽)


에쿠니는 냉철함을 좋아한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냉정함과 열정을 오가며 자신의 사랑을 실험하는 듯하다. 그렇기에 기묘한 동거와 사랑 그리고 집착을 소설로 풀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때론 쫓아가기에 바빠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이들의 사랑 이야기에 공감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존재 자체를 거부당해 소유할 수 없는 하나코 그녀를 향한 두 사람의 줄다리기 같은 사랑.

올 막바지 여름에 이 작품의 사랑 이야기에 동참해 보는 것은 어떨는지. 다소 비현실적이라도 말이다. 원래 사랑이란 게 현실에서 몽상을 만들어주는 존재가 아니겠는가.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소담출판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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