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후손은 가난하다고 멸시받는다"

독립운동가 차치명 선생 손자 차수복옹

등록 2004.08.14 12:48수정 2004.08.17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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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독립운동가 차치명 선생의 손자 차수복옹과 손자 며느리.

독립운동가 차치명 선생의 손자 차수복옹과 손자 며느리. ⓒ 장선애

예산출신 독립운동가 차치명(1873∼1956) 선생의 손자 차수복(71)옹 집 마루에는 ‘충청남도 증'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힌 홍삼엑기스 선물세트가 놓여있었다.


“독립유공자 후손이라고 받는 건, 광복절 때 저거 하나 뿐여.”

오랜 세월 홀대에서 온 체념 때문일까. 새삼스럽게 억울할 것도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내뱉는 차옹의 첫 마디다.

예산읍 궁평리에 있는 그의 집에는 노부부만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허리디스크와 심장질환, 고혈압, 불면증, 관절염 등으로 일을 전혀 하지 못해 국민기초생활자금으로 연명한다.

부부가 받는 돈은 한 달 30만원. 요즘 같은 여름에도 그렇지만 겨울이 닥치면 난방비가 없어 전기담요 한 장으로 견디는 날이 부지기수다. 처음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지정될 당시 “독립유공자 집안인데 보훈처에서 받는 게 있지 않느냐”면서 중복 지원을 의심받던 것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5녀 1남의 자식들은 모두 출가했다.


차 옹은“없는 살림에 애들 중학교까지라도 가르치느라고 순전히 몸땡이로 때우며 품팔이했더니 몹쓸 병만 얻고, 부모라고 공부도 제대로 못시켰는데…. 지들 먹고살기 빠듯해 자주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이 어릴적 서당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인 그가 자식들 교육을 맘껏 시키는 것은 가능한 얘기가 아니었다.


차옹의 상황은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어이없는 속설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다.

차옹의 조부인 독립운동가 차치명 선생은 공주, 홍성, 예산 등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벌이면서 자신의 재산을 군자금으로 제공했다. 선생은 1909년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인의 집에 들어갔다가 ‘강도죄’로 징역 7년형의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차치명 선생의 남은 재산을 모두 빼앗았고, 해방 후에도 그 재산을 돌려주지 않았다.

대단히 큰 부자였다는 이 집안은 나라를 지키려다 빈털털이가 됐고, 당시 엘리트층이었을 집안의 후손들은 교육의 기회로부터 박탈당했다. 정부는 선생이 고인이 된 후인 1990년에 와서야 겨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했지만 "독립유공자가 해방 이후 사망했을 경우 아들까지만 보상을 한다"는 보훈 규정에 묶여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독립유공자 발굴에 정부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유족들 스스로 판결문 같은 완벽한 증거를 물색해 제시해야 하는 현실에서 다시 독립유공자의 사망시점과 추서 시기에 따라 보상을 받는 대상이 ‘아들까지’냐, ‘손자까지’냐가 달라지는 것이 현실이다.

차옹은 “4∼5년 전 이의 시정을 요구하기 위해 안 가본데 없이 다녀봤지만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면서도 “신문에 내 얘기가 나가면 달라지는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차옹은 보훈처보다 군에서 도움을 더 많이 받는다고 한다. 지난해 비가 새는 지붕을 새로 해준 것도, 올해 가스안전시설을 해준 것도 독립유공자 후손이어서가 아니라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써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래도 좀 다른 예우가 있지 않을까 싶어 자꾸 물으니 “3·1절 때하고 8·15때 행사에 초대받아 독립기념관에 가는 것”을 꼽는다. 그나마도 들러리이긴 하지만….

최근 친일진상규명특별법을 둘러싸고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며 차옹은 어떤 생각을 할까.

“뭐 별 생각 있나. 나는 그저 나라 찾는다고 독립운동하다 집안 재산 다 날리고 이렇게 대대로 가난을 물리고 있으니 이거나 어떻게 해결됐으면 좋겠어.”

그거와 이거가 어떻게 분리될 수 있겠는가. 해방 후 친일세력 후손들이 다시 득세해 사회 각 분야에서 권력과 재력을 장악하며 살고 있으니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당연히 ‘예우’가 아닌 ‘동정’을 받거나 혹은 가난하고 못 배워 ‘멸시’를 받고 있을 밖에….

4년 전 윤봉길 의사 손자인 윤주웅씨가 기자와 인터뷰 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a 독립유공자후손의 집임을 알리는 문패. 비닐에 정성껏 싸여있다.

독립유공자후손의 집임을 알리는 문패. 비닐에 정성껏 싸여있다. ⓒ 장선애

“독립유공자 가족들의 생활은 참 어렵다. 가장을 잃어 일단 생계가 어렵고 자녀들의 교육문제도 그렇고. 우리 집안도 내가 고 3때 집안 살림을 꾸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직전에서야 연금이 제대로 나왔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불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철이 들고나서는 할아버지의 높은 뜻이 이해됐고, 원망을 하지는 않았다.”

애국을 강조하면서도 독립운동을 한 것이 자부심이 아니라 ‘삶의 족쇄’가 되고 있는 나라. 앞으로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해 나설까. ‘다 지난 일’인 친일청산을‘하필 경제가 어려운 지금’에라도 해야 하는 이유다.

차옹의 집을 나서면서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독립유공자의 집안임을 알리는 태극문양의 문패였다. 돌에 새긴 문패가 비바람에 상할 일도 없으련만 문패는 비닐에 겹겹이 싸여있었다. 눈이 시리고 가슴이 뭉클하다.

독립유공자보다 더 잘 살면서‘과거사는 묻어두자’는 비논리에 입 다물고 마는 우리들 모두는 죄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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