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 누야에게 보내는 박꽃 편지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90>그 수숫대 아래 뒹굴던 '찬박'

등록 2004.09.06 16:19수정 2004.09.0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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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어릴 적에는 '박'을 '찬박'이라고 불렀다

내가 어릴 적에는 '박'을 '찬박'이라고 불렀다 ⓒ 이종찬

누야! 박이 탐스럽게 영그는 가을이 다가왔어.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이 세상을 송두리째 불태워버릴 것처럼 쨍쨍 쏟아지던 땡볕도 날이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고. 그때 누야와 함께 바라보던 그 비음산 기슭에서는 벼가 누야의 수줍은 얼굴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며 노란 세상을 자꾸만 흔들고 있어.


누야가 식모살이를 떠나던 그해, 초가을에도 하얀 박꽃이 정말 많이 피어났었지. 서너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고, 또다시 서너 걸음 가다가 뒤돌아보며 징징 울던 누야. 박꽃 위에 동그란 눈물방울 떨어뜨리며 듬정마을(가음정)로 식모살이를 떠나던 누야. 지금 누야가 떠나던 그 밭두렁 곳곳에서도 누야의 야무진 꿈처럼 큼지막한 박이 영글고 있어.

누야! 나는 저 덩그런 박을 바라볼 때마다 자꾸만 누야 생각이 나. 그때 다시 돌아온 누야는 옆구리에 작은 보따리 하나 낀 채 찌르레기처럼 흐느끼면서 마을 어귀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어. 행여 누가 볼세라 수숫대 사이에 그 작은 몸을 숨긴 채 진종일 어깨만 들썩이고 있었지. 곧추세운 두 다리에 박처럼 갸름한 얼굴을 깊숙이 묻은 채.

그때 누야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지, 아마. 나보다 나이가 세 살 많았던 누야가 앞산 너머 식모살이를 갔다가 마을 어귀에 나타난 그해 초가을, 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그날 누야는 박꽃이 하얗게 피어나는 저녁 무렵까지도 그렇게 주저앉아 마냥 흐느끼고만 있었어. 볼록한 아랫배 속에는 씨도 모르는 아기까지 덜렁 밴 채.

a 박꽃처럼 환한 세상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박꽃처럼 환한 세상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 이종찬


a 누야에 대한 내 그리움처럼 탐스럽게 매달린 박

누야에 대한 내 그리움처럼 탐스럽게 매달린 박 ⓒ 이종찬

"누야(누나)! 와 그리 울고만 있노? 오랜만에 왔으모 퍼뜩 집으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쉬이~ 니 이짜서(여기서) 내 봤다 소리 절대 하지 마라이. 우리 아부지 알았다카모 그때부터 내는 고마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진께네."
"그렇다고 밤새 이랄 끼가.(이럴 거냐)"
"니는 고마 모른 치(모른척) 해뿌라."


그날, 누야는 끝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어. 캄캄한 밤중에 슬쩍 다녀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 다음 날 아침 내가 학교에 가기 위해 그 수수밭을 지날 때 누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 누야가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던 그 수숫대 아래에는 누야의 얼굴처럼 갸름하고도 둥근 찬박이 하나 덜렁 놓여져 있었고.


그때부터 나는 누야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아니, 그해 추석날에도 누야는 끝내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어. 그 뒤 간혹 누야가 마산의 어느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고, 어느 다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어. 하지만 나는 고향을 떠날 때까지도 누야의 얼굴을 끝내 볼 수가 없었지.

누야! 그때 나는 우리 집 헛간의 초가지붕 위에서 하얀 박꽃이 피어날 때마다 누야의 갸름한 얼굴이 떠오르곤 했어. 그리고 아이를 밴 누야의 아랫배처럼 통통한 박이 주렁주렁 매달릴 때마다 누야의 꿈을 꾸곤 했지. 꿈속에서 바라본 누야는 등에 찬박처럼 예쁜 딸아이 하나를 엎고 있었어.


a 박은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따서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으면 상큼한 게 정말 맛있다

박은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따서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여 먹으면 상큼한 게 정말 맛있다 ⓒ 이종찬


a 이 가을, 사람들의 꿈도 저 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렸으면 좋겠다

이 가을, 사람들의 꿈도 저 박처럼 주렁주렁 매달렸으면 좋겠다 ⓒ 이종찬

찬박? 그래, 그때 누야는 '박'을 '찬박'이라고 불렀지. 왜 하필 찬박이라고 불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여튼 누야가 그렇게 사라진 그해 초가을부터 나는 소 풀을 베러갈 때마다 그 수수밭 주변으로 갔어. 그리고 하얀 박꽃 아래 누야에 대한 내 그리움처럼 뒹굴고 있었던 그 찬박을 오래 오래 바라보곤 했고.

"이런, 이런! 어떤 넘의 손이 이 귀한 찬박에다 해꾸지(해꼬지)로 해놨노."
"쯧쯧쯧. 이 찬박이 딴 넘보다 하도 잘 생겨서 추석 때 탕수국을 끓일라꼬 했더마는 고마 베리뿟네.(버렸네)"
"어떤 넘의 손인지 걸리기만 해봐라. 당장 다리몽뎅이로 딱 뿌질라 뿔낀께네.(다리를 부러뜨릴 거니까)"
"야아야~ 니도 소풀만 베지 말고 우리집 찬박도 좀 지키거라이. 니 꺼 내 꺼 없다. 어차피 마을사람들끼리 다 나눠먹을 꺼 아이가."


그 수수밭 주변에서 소풀을 베던 나는 가슴이 뜨끔했어. 며칠 전에 내가 그 찬박에 '누야! 지금 오데 있노? 정말 보고 싶다'라는 글씨를 썼거든. 하지만 나는 시치미를 뚝 뗀 채 다랑이 밭두렁에 앉아 소풀만 열심히 벴어. 언젠가는 누야가 찬박에 새겨진 내 글씨를 보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말이야.

나는 그해 가을 내내 누야가 떠난 그 자리에 그리움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그 찬박을 바라보며 누야를 끝없이 기다렸어. 하지만 누야는 내가 글씨를 새긴 그 찬박의 껍질이 단단히 여물도록 끝내 돌아오지 않았지. 그 찬박 또한 첫 서리가 내리도록 바가지도 되지 못하고 밭두렁에 정말 쓸쓸하게 버려졌고.

a 박꽃이 시든 곳에 박이 숨겨져 있다

박꽃이 시든 곳에 박이 숨겨져 있다 ⓒ 이종찬


a 올 가실에는 저 박처럼 이 세상의 넝쿨에 내 꿈을 매달고 싶다

올 가실에는 저 박처럼 이 세상의 넝쿨에 내 꿈을 매달고 싶다 ⓒ 이종찬

"아지메! 내년에도 찬박을 심을 낍니꺼?"
"와? 니는 찬박이 그리도 좋더나?"
"그기 아이고예, 찬박을 보모, 고마 부자가 된 거 같아서예."
"찬박도 그냥 열리는 기 아이다. 내 말은 너거들은 우짜든지(어쨌든지) 공부로 열심히 해야 찬박처럼 탐스런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이 말이다."


그래. 그때 누야의 어머니는 찬박으로 요리를 참 잘 만드셨지. 해마다 이맘때면 누야의 어머니는 누야의 초가지붕 위에 주렁주렁 매달린 찬박을 따서 껍질을 깎은 뒤 일정한 크기로 잘라 뜨거운 물에 데쳐 찬박나물을 무쳤어. 그리고 추석이 다가오면 탐스런 찬박을 반으로 자른 뒤 눈처럼 하얀 속을 파내고 무처럼 토막을 내 탕수국을 만들기도 하셨고.

그뿐만이 아니었어. 누야의 아버지는 껍질이 단단하게 여문 잘 생긴 찬박으로 물바가지를 참 잘 만드셨지. 그때 누야의 아버지는 물바가지를 만들 찬박은 추수가 끝날 때까지 초가지붕 위에 그대로 두었어. 그러다가 첫 서리가 내리면 찬박을 따서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 속을 모두 파낸 뒤 그늘에 오래 말렸어. 그러면 금세 노랗고 예쁜 바가지가 몇 개씩 만들어졌었지.

누야! 지금도 나는 밭두렁이나 탱자나무 울타리 사이에 탐스럽게 영글고 있는 찬박을 바라보면 누야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지금 누야가 어디에서 무얼하며 살고 있는지도 잘 모르지만. 아마도 누야는 지금도 그때처럼 조그만 보따리 하나 옆구리에 끼고 징징 울면서 찬박 속처럼 하얀 세상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아. 정말 바보 같이.

누야!
보고 싶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그 수수밭의 찬박처럼 자꾸만 영그는
나의 누야!

a 누야! 정말 보고 싶다

누야! 정말 보고 싶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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