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방에 가고 싶었던 이유

한국어 교과서 이야기<1>

등록 2004.09.09 13:16수정 2004.09.0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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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도착한 지 두 달도 안 되어 경주와 설악산에 가 봤고 고궁이나 시장도 여러 번 가봤지만 그래도 아직 서울의 향기를 다 느끼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었다. 다방에 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한국에 갔을 때 꼭 다방에 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다방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살던 신촌은 물론 종로, 명동, 강남에도 다방은 없었다. 커피숍, 카페, 소주방, 호프집 등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다방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다방'이라고 써 있는 간판을 하나 봤는데 결국 실망만 하고 말았다. 그 당시 연세대학교 앞에는 '독수리 다방'이 있었다. 간판만 봐서는 드디어 다방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다방에 들어섰는데, 내 기대는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그냥 여느 커피숍이나 다름 없었다. 괜찮은 커피숍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그런 다방은 아니었다.

한국 친구를 몇 명 사귀었을 때, 그들과 밥을 먹고 어디를 갈까 의논했었는데 내가 "다방에 갑시다"라고 했더니 친구들은 모두 웃었다. 다방은 아저씨들만 가는 곳이라고 말했다. 내가 상관없다며 다방이 어디에 있는지만 가르쳐 주면 혼자서라도 갈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내 친구들 역시 다들 아는 다방이 없다고 해서 그냥 포기했다.

내가 이처럼 다방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내 첫 한국어 교과서 때문이다. 한국에 가기 전, 두 학기 동안 한국어 수업을 들었다. 수업에 결석도 하지 않았고 A도 받았지만 한국에 와서 내 준비가 너무나 부족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처음 갔을 때 길을 잃어 목적지에 어떻게 가느냐고 사람들에게 물어 볼 수는 있었지만 상대방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그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고 또 물었다. 한국에 가기 전에 한글을 배우고, 기본적인 문법을 배운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 첫 한국어 교과서는 1989년에 출판된 것이었다. 현재와 1989년의 한국어가 그리 다르지 않지만(얼짱, 몸짱 같은 건 제외하고) 한국 사회나 문화는 많이 바뀐 것 같다. 교과서는 그냥 언어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그 나라 문화나 생활습관도 가르치는 것이다. 그 면에서는 내 교과서는 시대와 많이 떨어졌다.

a Namgui Chang, Yong-chol Kim [Functional Korean (Hollym, 1989)]

Namgui Chang, Yong-chol Kim [Functional Korean (Hollym, 1989)] ⓒ 현빈

그 교과서에서는 한국 주인공은 미스터 윤이었고 외국인 주인공은 미스터 베이커였다. 교과서에 의하면 서울에는 어디 가도 다방이 있다고 해서, 나도 윤씨와 베이커씨처럼 다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윤씨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다방에 갈 수 있었을텐데…'라고 생각했다.


a Namgui Chang, Yong-chol Kim [Functional Korean (Hollym, 1989)]

Namgui Chang, Yong-chol Kim [Functional Korean (Hollym, 1989)] ⓒ 현빈

교과서에 나오는 다방 사진을 보면 분명히 20년 전에나 썼던 것이다. 나는 사진만 오래된 것이 아니고, '다방 시대는 완전히 지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시골에 가서 보니 '다방'이라고 써 있는 간판이 많았다. 시골에는 커피숍이나 카페보다 다방이 더 많은 것 같았다.

마침내 시골 다방에 들어갔다.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사진처럼 호화스러운 곳은 아니었지만 똑같은 70년대 분위기였다. 음악, 가구, 인테리어 등 다 오래된 것이었다. 인사동 같은 곳에 돈 많이 들여서 다방과 비슷한 분위기로 만든 카페가 아마 몇 군데 있겠지만, 그 시골 다방은 진품이었다.

내 교과서에 다른 말도 시대와 많이 떨어졌다. 예를 들면, 내가 오랫동안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다. 우리 동네 국민(?) 학생 몇 명 덕분에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뀐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시청 앞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났을 때 일이다. 그 친구가 어디 가느냐고 물어서, 내가 책방에 간다고 했다. 친구는 "이 근처에 책방이 있나?"라고 의아해 했다. 내가 "교보빌딩 지하에 있는 큰 책방 모르니? 너 서울 사람인데도…?"하자, 친구는 "책방이라니? 무슨 책방? 서점이지. 그렇게 큰 서점은 '책방'이라고 하면 진짜 촌스러워"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 날 나는 '국민학교' 수준의 촌스러운 한국어를 고치려고 '책방'에서 새 교과서를 사서 하루종일 '다방'에서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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