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전하부터 제대로 하소서"

[김보일 칼럼 33] 김태완의 <책문 -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등록 2004.09.14 15:06수정 2004.09.15 11:15
0
원고료로 응원
구멍가게 하나 꾸려나가는 데도 경영의 노하우가 필요한데, 하물며 국가 경영임에서랴. 이게 옳다 하면 저쪽에서 들고 일어나고, 저게 옳다하면 이쪽에서 볼멘소리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출까, 아무리 좋은 뜻인들 힘있게 밀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목숨을 내놓을망정 이권을 놓을 수 없다는 도당(이익집단)들의 압력도 압력이려니와 초상 치르는 일 하나까지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을 일삼는 선비들의 입바른 소리도 얄밉고, 마마 크신 국량으로 통촉하시오소서, 혜량하시오소서, 사사건건 생트집을 잡는 보수언론의 '딴지'도 달갑지 않다. 나도 잘 해보자는 이야긴데, 왜들 이러시나, 대체 이들이 왕을 뭣으로 안단 말인가.


a

ⓒ 리더스가이드

왕은 답답했다. 종묘사직을 위하자는 건지, 왕의 발목을 잡자는 건지, 대신들의 행태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대체 이 늙은이들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왕은 과거에 급제한 싱싱한 선비들에게 묻는다.

젊은 선비라. 옳다. 그 싱그러움이 보기에 장히 좋다. 아직은 수구적 이익에 눈이 어두워지지 않았으니 좋고, 비록 엉뚱하기는 하더라도 고루한 세상의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았으니 좋다.

비록 경험이나 관록이 짧다고는 하나 세상에 옳게 한 번 쓰여 보겠다는 젊은 포부와 패기도 싱싱하고 우람하다. 대개 낡은 것들은 부패의 조짐을 보이기 십상, 젊은 너희들의 생각은 어찌 한고, 왕은 싱싱한 선비들에게 나랏일을 물었다. 이에 대한 선비들의 답이 소위 '책문(策問)'이다. 대체 이 나라에 비전이 있는가, 있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고, 그대들의 식견을 어디 말해 보거라.

'하루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 속에 가시가 돋친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도 했고,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고도 했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읽은 게 글이요 책이었다. 선비, 그들에게 학문의 목표는 인간의 완성에 있지 않았다. 세상에 몸을 세워 이름 석자를 드날리자는 소위 '입신양명(立身揚名)'에 있었다. 장부가 세상에 나매 그것이 효의 끝이었다.

책문이라, 임금 앞에서 제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으니 이 때가 호기렷다. 나랏님 눈에 들어야 하니, 출중한 미모를 뽐내자. 가급적이면 고전과 문장에 대한 도드라진 실력을 뽐낼 수 있어야겠다.


사서삼경을 구구단 외듯 줄줄이 외며 박람강기(博覽强記)를 뽐내자, 선비들은 야후니 구글이니 엠파스니 인터넷 검색엔진을 동원하지 않고도 수많은 고전 속의 문장들을 기억의 하드디스크에서 불러낸다. 아날로그 세대라 해서 얕보지 말자. 그 양과 속도가 만만치 않다. 하긴 맹자왈 공자왈 공부가 몇 년인가.

실력을 뽐내는 데서 그친다면야 기억 용량이 큰 자가 제일이겠다. 그러나 지(智)보다는 덕(德)이라 하지 않던가. 어리숙한 선비가 산을 옮기는 법,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랬다. 우직한 기개와 우국충정의 간곡함이 문장에 실린다면 까짓 지자쯤이야 무슨 문제랴.


선비들은 자신의 의기와 충정을 문장에 담았다. 그러나 직언(直言)에는 리스크가 따랐다. 아무리 바른 말을 해봐야, 도당들의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이고, 왕도 도당들의 이해관계와 무관하지 않으니 까딱하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리스크가 크면 돌아올 영광의 크기도 커지는 법, 때로는 목숨도 걸어볼 일이다.

한 번 죽음을 무릅쓰면 크게 한 번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더구나 장부가 세상에 한 번 나, 자신의 포부를 알림에 무슨 거리낌과 망설임을 두겠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한다. 책문은 그런 '의기'로 쓰였다. 좋게 말해 '의기'요, 속된 말로 '깡다구'였다.

광해군 즉위 3년인 1611년, 과거시험의 2차 합격자 33명을 직접 눈 앞에 불러놓고 광해군은 선비들의 깡다구와 배짱과 실력을 시험했다. 성적의 등급에 따라 벼슬의 높고 낮음이 결정되는 자리였다. 선비들,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물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절실한 문제였다. 어디 대답해 보거라.

어리석고 사리판단도 할 줄 모르는 내가 나라의 대업을 이어받긴 했지만 나는 지혜도 모자라고 현명하지도 않다. 깊은 못과 살얼음을 건너야 하는데 건너갈 방법을 모르듯,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하게 인재를 불러 모아 나랏일을 해결해야 하는데, 선비들은 의견이 달라 서로의 차이를 조정할 길이 없고, 서로 마음을 다해 공경과 화합을 이루려는 미덕도 찾아볼 수 없다……그대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이다. 필시 마음속에 북받쳐 오르는 뜻을 품고 있었을 테이니, 저마다 자기 생각을 다 표현해 보라. 내가 직접 살펴보겠다.

왕이지만 스스로 어리석다고 하는 겸손이 예사롭지 않다. 선비 중에 임숙영이란 자가 있었다. 그는 왕처럼 겸손하게 대답한다.

"저는 참으로 꽉 막혀 식견이 없습니다."

문맥을 그대로 믿으면 오산이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대답하겠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목이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불퇴전의 선비정신이 불꽃을 튄다.

a 임숙영 필적

임숙영 필적 ⓒ 리더스가이드

요즈음 사대부들은 이리 찢어지고 저리 나뉘어 각기 붕당을 세워 현명하고 어리석음,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뜻이 맞는 사람만 붙여주고 뜻이 다른 사람은 배척합니다……임금이 마음을 써서 일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하늘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이 특별히 누구를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듯이, 임금도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미워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아랫사람의 처지에서 윗사람의 잘못을 따지는 것인 만큼, 임금이 비록 마음을 비우고 들으면서 뜻을 굽혀 따른다고 해도, 저 유순하고 마음 약한 선비들은 오히려 지레 할말을 다 못하는 법입니다. 하물며 바른 말을 하면 노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곧고 강직한 신하가 아니고는 누가 기꺼이 나서서 전하께 바른 일을 할 수 있도록 권할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왕 당신부터 잘하라는 소리다. 똑바로 듣고 처신 잘 하라는 소리다. 그 일갈이 마치 아랫사람을 대하듯 추상같다.

'이쯤하면 막 가자는 거지요?'

왕은 일순 자존심이 상한다. 왕은 분개했다. 바른 말도 좋지만 이래도 되는 건가. 너를 내침으로써 법과 기강과 국가의 품위를 바로 세우리라. 이런 자는 본 때를 보여주어야 국왕으로서의 품위가 서겠다 싶었는지 광해군은 일갈한다.

이 친구 벼슬 취소하시오, 그리고 당장 귀양 보내시오, 이에 영의정, 좌의정, 한다하는 대신들이 마마 고정하소서, 마마 통촉하소서 극구 말린다. 왕의 돈후대덕하심이란 뭔가. 이럴 때 한 번 크게 쓰는 것이다. 좋다 내 자애로운 군주의 도리를 보여주마. 알았다. 내 참으마, 고정하마. 왕은 넉 달 만에 노염을 풀면서 한 마디 덧붙인다. "앞으로 내가 질문 한 것에서 벗어난 대답하는 자들은 뽑아선 안돼! 묻는 것만 대답하라구."

새만금호 사업, 이래저래 이권이 얽혀 난리다. 이 사업을 접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너희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인터넷이 요즘 욕설창고가 되었고, 음란비디오가 난리인데 이에 대한 너희들의 방책을 들어보자. 이랬다저랬다 하는 대학입시 문제, 어디 너희들의 시원한 대책을 들어보자. 언론개혁을 언론탄압이라고 몰아붙이는 자들이 있는데, 뾰족한 특단의 대책이 없을꼬. 정경유착, 이거 심각한 문제다. 수구세력의 입을 막으며 쾌도난마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비책을 말해 보거라.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와 전망에 대한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고 …….

뭐 이런 것들이 책문의 현대식 버전이랄 수도 있겠다. 국가 경영의 노하우를 왕이 묻고 선비들이 답하는 것이 책문이었다. 거기에는 국가 최고 CEO의 고민이 담겨있다.

지금도 사법고시 예상문제를 가르치는 '고시학원'이 신림동 고시촌에 즐비하듯 조선시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번에는 당쟁 문제가 나오지 않을까, 아니 일본과의 통상마찰이 나올 거야, 아니 청나라와의 외교적 문제가 나올 거야, 한참 예상문제를 찍어가며 공부할 때, '어리석은 선비들아, 아마도 이런 문제가 나올 줄은 몰랐을 거다. 어디 맛 좀 봐라.' 광해군은 참으로 장난스런 책문의 주제를 내린다.

어릴 때는 새해가 기뻤으나 점차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글픈 마음이 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어랏, 이것도 책문의 주제가 되나. 안 되는 게 어디 있나. 어명이다 물으면 답하라. 이에 대해 이명한이란 선비는 답했다.

살아서 볼만한 것이 없고 죽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다면, 초목이 시드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무지한 후진을 가르쳐 인도하고, 터득한 학문을 힘써 실천하며,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바르게 앉아 마음 모으기를 일평생 하면 (죽을 때가 되어도) 무에 마음에 유감이 있겠습니까"

인생이 허무하다느니 어쩌느니 치졸한 감상에 빠지지 말고 짧은 인생, 마음을 모아 공부하라는 왕에 대한 어른스런 훈계였다.

a 책문 -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책문 -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소나무

<책문>(소나무)은 책문 13개와 대책 15개를 우리말로 옮겼으니, 책은 모두 13장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단순 번역은 아니다. 각 장마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관련된 인물들의 감춰진 이야기를 재구성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이 책은 과거를 단순히 끌어 모은 책은 아니다. 수많은 사료(事料) 중에서 의미 있는 사료(史料)를 모을 수 있는 편집자적 감각, 그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라면 이 책에 실린 책문 13개는 충분히 현재적 의미를 지닌다.

'술의 폐해를 논하라'는 중종, '정벌이냐 화친이냐'를 물은 선조, '인재를 어떻게 구할 것인가'라고 물은 세종 등의 책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더구나 대책문 뒤에 덧붙인 저자 김태완의 다음과 같은 글은 고전을 빌려 현재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사림은 명종 이후 훈구세력 붕괴로 갑작스레 국정을 주도하게 됐다. 관료로서 훈련을 쌓을 기회가 없었던 그들은 정국 운영에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사림은 잔존하는 훈구세력을 포용해 대국적인 정국 운영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과 대립각을 세웠다. 그 바람에 관료사회가 동서 붕당으로 연결돼 조선 사회의 누적된 모순 개혁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여기서 저자의 정치적 색깔에 대해서 따져 물으며 날을 세우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단 책문의 현장으로 들어가 조선의 지도자, 한 국가의 CEO가 어떤 고민을 했고, 젋은 선비들이 어떤 대책문을 썼는지 일독하는 것이 급선무다.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 조선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

김태완 엮음,
소나무, 2004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최근 알게 된 '평생직장', 정년도 은퇴도 없답니다
  2. 2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경남, 박근혜 탄핵 이후 최대 집회 "윤석열 퇴진"
  3. 3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은퇴 하면 뭐 하고 살거냐?" 그만 좀 물어봐요
  4. 4 임종 앞둔 아버지, '앙금'만 쌓인 세 딸들의 속내 임종 앞둔 아버지, '앙금'만 쌓인 세 딸들의 속내
  5. 5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V1, V2 윤건희 정권 퇴진하라" 숭례문~용산 행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