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대의 커피머신, 고려대의 스타벅스

낡고 오래된, 그러나 '오픈마인드'인 비엔나대학에서 배울 점

등록 2004.10.08 06:47수정 2004.10.11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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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나대학교, 오스트리아 지성인의 공간

오스트리아에도 한국의 소위 'SKY' 대학에 버금가는 톱3 대학이 있다. 비엔나대학교, 그라즈대학교, 그리고 린즈대학교가 그것이다.

a Haupt UNI - 비엔나대학교의 메인빌딩

Haupt UNI - 비엔나대학교의 메인빌딩 ⓒ 배을선

2004년 세계대학 톱 500위 중 86위, 또 유럽대학 순위에서는 29위를 차지한 비엔나대학교는 전문적인 학문을 탐구하려는 오스트리아인들과 외국인들에게는 최고의 대학으로 꼽힌다.

그렇다면, 얼마나 공부를 잘해야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을까? 한국처럼 강남의 명문고교에서 전체 등수 어쩌구 하는 '입시가이드'는 없다. 고등학교 졸업 자격증인 마투라(Matura)만 통과한다면 누구나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a 비엔나대학교를 졸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비엔나대학교를 졸업한 지그문트 프로이트 ⓒ 배을선

마투라는 무엇인가? 일종의 고등학교 졸업 시험이다. 음악 공부를 위해 오스트리아에 조기 유학을 온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은 마투라에 합격해야 오스트리아의 음악대학에 진학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에는 한국의 음악도뿐만 아니라, 호텔, 경제, 경영, 그리고 의학을 탐구하기 위해 유학 온 중국과 터키 등 외국 학생들이 꽤 많은 편이다.

‘칭따오’맥주로 유명한 중국 청도(靑島)에서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스트리아의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한 삐영(20)은 “현재 16, 17살인 아이들과 한 반에서 모든 것을 독일어로 배우고 있다”며 “이곳에 온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 독일어가 서투르다. 독일어와 독일문학뿐만 아니라 불어, 영어, 수학과 과학 등 모든 것을 독일어로 배우려니 머리가 터질 것 같다”고 푸념했다. “중국에서 열심히 돈을 보내 주는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경영대학에 진학해야만 하는데 마투라에 실패할 것 같아 걱정”이라는 게 현재 삐영의 고민이다.

이처럼 외국인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오스트리아인들은 한국처럼 과외활동 없이 고등학교의 정규 과정만으로 마투라에 합격해 대학에 진학하거나 한국의 전문대 정도에 해당하는 칼리지에 진학한다.


뫼들링(Moedling)에서 광고상업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알렉산드라(17)는 "난 대학이 아니라 칼리지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은 학문 탐구를 하는 곳이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졸업도 어렵지만 칼리지는 2~3년만 다니면 되기 때문"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a 비엔나대학교에는 학교를 빛낸 문호들과 명인들의 조각상들이 빼곡히 가득하다

비엔나대학교에는 학교를 빛낸 문호들과 명인들의 조각상들이 빼곡히 가득하다 ⓒ 배을선

하지만 입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졸업은 그 누구도 쉽지 않은 곳이 이곳 비엔나대학교, 아니 오스트리아의 모든 대학교의 시스템이다.


무엇이 비엔나대학교를 특별하게 만드는가?

비엔나대학교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오픈 마인드’에 있다. 보통의 대학 수업은 '강의'와 '실기'로 나뉘는데, 등록한 학생들만이 수업에 참석할 수 있는 실기와 달리 강의는 모든 사람들에게 문이 열려 있다. 즉 수업료를 내지 않은 학생들은 시험을 볼 수는 없지만 강의는 들을 수 있는 청강제도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이다. 몇몇 유명한 교수의 강의 시간에는 천명도 훨씬 넘는 학생들이 강의를 들으러 오는데 강의실 안으로 발도 디딜 수 없을 때가 허다하다.

강의의 마지막은 시험으로 마무리 되는데, 학생들은 스스로 시험 날짜를 정할 수 있고 자신이 없으면 시험 날짜를 미룰 수 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험 날짜를 몇 년씩 미뤄 가며 7, 8년씩 대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을 만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a 비엔나대학교의 캄푸스, 일반인들에게 아무런 경계 없이 오픈된 이곳은 일종의 공원이다.

비엔나대학교의 캄푸스, 일반인들에게 아무런 경계 없이 오픈된 이곳은 일종의 공원이다. ⓒ 배을선

‘캄푸스’라고 불리는 비엔나 대학교의 캠퍼스는 한 학교의 캠퍼스라기보다는 동네 공원 같은 역할을 한다. 캠퍼스 안에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의 슈퍼마켓인 ‘빌라(Billa)'가 위치하며 바로 앞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있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한가롭게 대화도 나누고 책도 읽으며 낮잠도 즐긴다. 아이들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놀기도 한다. 이곳에 위치한 몇몇 레스토랑과 바는 전형적인 비엔나 시내 중심가의 레스토랑과 비슷한 가격대의 음식을 제공한다. 평균 7~11유로(만원~만오천원) 정도 하는 한끼의 식사가 학생들에게 만만할 리 없다.

a 비엔나대학교의 닉빌딩. 가장 최근에 지어진 대학건물이라고는 하지만 1970년대에 지어졌다.

비엔나대학교의 닉빌딩. 가장 최근에 지어진 대학건물이라고는 하지만 1970년대에 지어졌다. ⓒ 배을선

때문에 학생들은 1970년대에 지어진 가장 최근의 대학 건물인 닉(NIG : Neues Instituts Gebaeude)의 7층에 위치한 멘사(MENSA) 레스토랑에서 주로 식사를 한다. 가격대는 1~5유로(약 1~7천원).

천원, 이천원선의 샌드위치부터 크기가 다양한 샐러드 뷔페, 오스트리아의 음식과 음료수 등의 메뉴가 전부지만 이 곳 멘사는 학생들을 비롯, 비엔나 대학교의 교수들도 자주 찾는 식당 중 하나다. 학교와 관련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식당이며, 특히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 때는 저렴한 가격에 한끼의 식사를 해결하려는 한국 배낭 여행객들이 무리를 지어 찾아오기도 한다.

a 닉 건물의 2인승용 엘리베이터. 개폐문이 없고 빠르게 돌아간다. 점프를 해서 타야 한다.

닉 건물의 2인승용 엘리베이터. 개폐문이 없고 빠르게 돌아간다. 점프를 해서 타야 한다. ⓒ 배을선

닉의 멘사에는 명물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셀프서비스 커피머신이다. ‘에스프레소’와 ‘멜랑지’(Melange)의 버튼 2개만 달린 이 커피머신은 비엔나의 전통 커피를 좋아하는 모든 이들의 손때 묻은 기계로 취향대로 설탕 및 우유 등을 직접 첨가할 수 있다.

a 닉 건물 학생식당 멘사의 명물 커피 머신. 2천원 정도의 그리 싸지도 않은 가격의 커피다.

닉 건물 학생식당 멘사의 명물 커피 머신. 2천원 정도의 그리 싸지도 않은 가격의 커피다. ⓒ 배을선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비롯해 유럽의 유명 문호들, 의사들과 과학자들을 배출한 비엔나 대학교에는 학생만을 위한 별도의 공간이 거의 없다. 강의 시작 전 몇 백명의 학생들은 좁은 복도에 앉거나 서서 책을 읽거나 담배를 핀다. 비상구 계단은 그나마 앉아 있기가 나은 공간이라 언제나 만원이다.

학생들을 위한 글로벌한 장소라면 닉 건물에 위치한 컴퓨터실을 들 수 있지만 이곳은 사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학생들과 교수 대부분은 저렴한 가격의 멘사에서 식사를 하고, 커피도 낡은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자국의 전통 커피를 마신다. 대학교 주변에는 서점과 문방구와 몇몇 레스토랑이 전부며 유명한 패스트푸드점이라면 맥도날드밖에 없다.

a 남녀노소, 인종에 관계없이 캄푸스를 찾는다. 뒤로는 슈퍼마켓이 위치해 있다.

남녀노소, 인종에 관계없이 캄푸스를 찾는다. 뒤로는 슈퍼마켓이 위치해 있다. ⓒ 배을선

낡고 오래된 대학 건물에는 학교를 빛낸 유명한 선배들의 조각상이 학생들의 학문에의 열기를 북돋우며 관광객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다.

‘첨단’은 없지만 ‘전통’이 있고, ‘입학’보다는 ‘졸업’이 어렵고, ‘취업’보다는 ‘학문’에 매진하며, ‘연예인특별전형’ 대신 ‘청강제도’가 존재하고, 학생들과 비학생들 사이에 ‘경계’ 대신 ‘오픈마인드’가 있는 곳이 바로 비엔나 대학교다.

그러기에 비엔나 대학교에서 연극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한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57)가 2004년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고려대학교와 스타벅스, 비엔나대학교와 커피머신

얼마 전 고려대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기해 ‘글로벌 대학’을 선언하면서 세계 100대 대학으로 도약할 겸 ‘타이거 플라자(가칭)’라는 학생들의 복지 공간을 만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10월 말에 완공될 지하 1층 지상 4층의 이 건물에는 스타벅스 및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선다고 한다.

a 캄푸스에선 아이들이 나무를 올라타고 놀지만 아무도 내려오라고 하는 이가 없다. 나무를 꺾지 않으면 된다.

캄푸스에선 아이들이 나무를 올라타고 놀지만 아무도 내려오라고 하는 이가 없다. 나무를 꺾지 않으면 된다. ⓒ 배을선

스타벅스는 이미 한국에서 103호점(2004년 10월 현재)을 개점할 만큼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미국의 거대한 커피 기업이 한국의 '뼈대 있는' 대학의 내부에 초록색 영어 간판을 내건다는 사실은 서울의 전통거리인 인사동에 위치한 스타벅스만큼 어색하다.

이런 변화가 고려대, 혹은 한국의 어떤 대학이 세계 100대 대학 순위에 진입하게 할 중요한 요소가 된다면 이는 너무나 반가운 ‘세계화’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은 학문 탐구가 아닌 겉치장에만 치중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고려대학교의 스타벅스와 비엔나대학교의 낡은 커피 머신. 어느 대학이 더 글로벌한 것인가?

a 캄푸스 안에서 한가롭게 독서 삼매경에 빠진 아름다운 모습.

캄푸스 안에서 한가롭게 독서 삼매경에 빠진 아름다운 모습. ⓒ 배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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