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하늘 훨훨 날아오르던 은빛 요정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97> '하늘수박'

등록 2004.10.11 15:14수정 2004.10.1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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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늘수박을 아시나요?

하늘수박을 아시나요? ⓒ 이종찬

지난 시월 초, 깊어가는 가을도 피부로 느끼고 머리도 식힐 겸 집에서 가까운 비음산(486m, 창원시 사파동)으로 산보를 나갔다. 비음산은 온몸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계곡 곳곳에 연지곤지를 콕콕콕 찍어 나가고 있었다. 비음산을 발찌처럼 두르고 있는 과수원에도 주렁주렁 매달린 바알간 감이 가지를 마악 찢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메뚜기가 타닥타닥 튀고 있는 황금빛 다랑이논과 마치 그 황금빛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가을 배추와 가을무가 진초록빛을 한껏 흔들고 있는 다랑이밭을 지났다. 그리고 지난 봄 가장 먼저 하얀 매실꽃을 피웠던 그 매실나무를 오래 바라보다가 문득 그 매실농장을 둘러싼 탱자나무 울타리에 눈길이 머물렀다.

'어? 저게 하늘수박 넝쿨 아냐?' 촘촘히 박힌 가시 사이에 보석처럼 노랗게 빛나던 탱자, 어릴 적 이맘 때 탱자나무집 가시나가 내게 건네주던 그런 동그랗고 향긋한 탱자를 찾던 나는 탱자를 한 알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대신 나는 그 탱자나무 울타리를 칭칭 감고 있는 하늘수박 넝쿨을 눈으로 샅샅히 뒤지기 시작했다.

a '하늘타리'라고도 불리는 하늘수박

'하늘타리'라고도 불리는 하늘수박 ⓒ 이종찬

a 하늘수박 속을 파내고 말려 찧은 뒤 먹으면 당뇨병에 좋다고 한다

하늘수박 속을 파내고 말려 찧은 뒤 먹으면 당뇨병에 좋다고 한다 ⓒ 이종찬

하늘수박 넝쿨이 탱자나무 울타리를 촘촘히 덮고 있는 그곳 어딘가에 분명 하늘수박이 내 어린 날의 꿈처럼 덩그러니 매달려 있을 것만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탱자나무 울타리를 칭칭 감고 있는 하늘수박 넝쿨이 매실나무를 감고 올라간 그 자리, 추억처럼 하늘수박 서너개가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저게 무슨 열매죠?"
"하늘수박이라고 부르는 열매랍니다. 하늘타리라고도 하지요."
"근데 저 열매를 왜 찍어요?"
"네에에?"


옳커니. 이제서야 어린 날 쪽빛 가을 하늘로 날려보낸 나의 꿈을 찾았구나. 속으로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 어린 날의 꿈을 열심히 찍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지나치는 등산객 한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 등산객은 하늘수박이라는 열매와 하늘수박이라는 낱말을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제 말은 저 열매도 먹을 수 있는 그런 거냐는 거죠."
"제가 어릴 적에는 저 열매를 따서 방에 걸어 두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꿈을 꾸기도 했고, 마을 어르신들은 저 열매의 속을 파낸 뒤 말려서 약으로 쓰기도 했죠."


a 하늘수박은 관상용으로도 좋고 약재로도 아주 좋다

하늘수박은 관상용으로도 좋고 약재로도 아주 좋다 ⓒ 이종찬

a 내가 자란 마을에는 하늘수박이 참 많았다

내가 자란 마을에는 하늘수박이 참 많았다 ⓒ 이종찬

그래. 그때 나는 하늘수박을 따서 앉은뱅이 책상 앞에 걸어두곤 했었지. 그리고 날마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파란 꿈을 꾸면서 우리가 하늘수박 씨앗이라고 부르던 박주가리 씨앗을 파아란 허공에 대고 후후 불곤 했었지. 그러면 할머니 쌈지 같은 주머니에서 은빛 날개를 펼친 요정들이 쪽빛 가을하늘을 끝없이 날아오르곤 했고.


"히야! 낙하산이다."
"이거는 땅에 떨어지는 그런 낙하산이 아이라 하늘나라로 떨어지는 그런 낙하산인기라. 그라이 니도 더 세게 불어라. 박주가리는 하늘에 심어야 안 되것나."
"그라다가 만약 땅에 떨어지모 우째되는데?"
"그라모 니 꿈도 그대로 다 뿌싸지뿌는 기지(부숴지는 거지), 뭐."


내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 곳곳에는 하늘수박이 참 많았다. 아랫집과 윗집 사이 야트막한 싸리나무 울타리에는 박넝쿨과 하늘수박 넝쿨이 서로 씨름이라도 하는 듯 엎치락 뒤치락 마구 뒤엉겨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엉긴 넝쿨 아래에는 저마다 자식 같은 동그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사실, 그때에는 지금처럼 집과 집 사이에 시멘트 담을 높이 치지 않았다. 집과 집 사이의 경계는 대부분 싸리나무 울타리였다. 담이 있어도 어른들 허리 높이 정도의 야트막한 흙담뿐이었다. 간혹 탱자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집도 있긴 있었다. 혹시라도 들킬세라 속내를 숨기며 좋아했던 그 가시나의 집처럼.

a 나는 어릴 때 하늘수박은 하늘나라 사람들이 먹는 수박인 줄 알았다

나는 어릴 때 하늘수박은 하늘나라 사람들이 먹는 수박인 줄 알았다 ⓒ 이종찬

a 하늘수박 잎사귀

하늘수박 잎사귀 ⓒ 이종찬

그래. 그때 나는 어쩌면 박주가리를 새파란 허공에 대고 후후 불면서 그 가시나와 시집 장가 가는 그런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하늘나라로 날려보낸 박주가리가 하늘나라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마침내 하늘수박을 매단 낙하산으로 날아와 그 가시나와 나를 행복의 나라로 둥실둥실 태워 주는 그런 꿈 말이다.

"니 오늘 소풀 베러 가는 길에 하늘수박 좀 많이 따온나. 그라고 미꾸라지도 몇 마리 잡아 오고."
"와예?"
"너거 할매가 당뇨병에 걸리가꼬, 요새 몸이 쪼매 안 좋다 아이가."
"할매한테 하늘수박을 멕여가(먹여 가지고) 우짤라꼬예? 하늘수박을 묵으모 넘(남)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간다 카던데."
"누가 그런 씰데(쓸데) 없는 소리로 하더노? 하늘수박을 묵어야 너거 할매가 하느님처럼 오래 오래 살 꺼 아이가."


어머니께서는 내가 따온 하늘수박의 속을 파내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바싹 말린 뒤 절구통에 콩콩콩 찧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한약재와 미꾸라지 말린 것도 함께 절구통에 넣고 콩콩콩 찧었다. 그리고 녹두 삶은 물에 반죽을 한 뒤 손바닥으로 슬슬 비벼 염소똥처럼 생긴 희한한 알약을 만들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만든 알약을 소주병에 차곡차곡 넣었다. 그리고 그 소주병을 무슨 보물단지처럼 감싸안은 채 할머니 집으로 가셨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내게 '니가 딴 하늘수박이라꼬?'하시며 삶은 밤을 까주시다가 그 염소똥처럼 생긴 알약을 한 주먹씩 입에 털어넣곤 하셨다. 그것도 하루에 서너 번씩이나.

a 탱자나무 울타리를 휘감고 있는 하늘수박 넝쿨

탱자나무 울타리를 휘감고 있는 하늘수박 넝쿨 ⓒ 이종찬

a 박주가리

박주가리 ⓒ 이종찬

'하늘타리'라고도 부르는 하늘수박은 우리 마을 사람들에게 참으로 귀한 약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내가 살았던 동산마을에는 약국이 없었다. 약국은 상남면(지금의 창원시 상남동)을 통틀어 꼭 하나뿐이었다. 그 약국은 우리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마을 사람들은 약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 마을 사람들은 집안 식구들 중 누군가 마악 숨이라도 넘어갈 듯이 몸이 심하게 아프지 않으면 아예 약국에 가지 않았다. 또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집안에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간단한 약재 몇 가지를 두고 있다가 급할 때 약으로 대신 사용했다.

하늘수박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사람들은 아이들이 불놀이를 하다가 불에 데이거나 동상에 걸리면 처마 끝에 걸어둔 하늘수박을 절구통에 찧어 그 가루를 발라 주곤 했다. 그리고 내가 후후 불던 그 하늘수박 씨앗을 빻아 보관하고 있다가 나이 많은 노인들의 목에 가래가 끼거나 기침을 자주 하면 드시게 했다.

"아나!"
"이기 뭐꼬? 낙하산 아이가. 이거로 내한테 주모 니는 나중에 뭐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갈끼고?"
"니가 타고 갈 때 내까지 태워주모 안 되것나."
"그라모 우리 둘이 평생 같이 살자 이 말이가?"


a 박주가리가 익었을 때 껍질을 열고 입으로 훅 불면 마치 낙하산처럼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박주가리가 익었을 때 껍질을 열고 입으로 훅 불면 마치 낙하산처럼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 이종찬

그래. 그 은빛 꿈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그때 그 가시나와 내가 마당뫼에 나란히 서서 새파란 허공에 하늘수박 씨앗을 대고 후후 불었던 그 찬란한 꿈. 쪽빛 가을 하늘로 훨훨 날아가는 그 낙하산을 둘이서 하늘수박처럼 매달려 나란히 타고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그 고운 꿈. 지금 붉게 붉게 지는 저 가을놀이 그때 우리가 날려보낸 그 은빛 아름다운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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