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면이 어디 밥 먹여 주는 것 봤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201> 서울일기<11>

등록 2004.10.29 09:01수정 2004.10.2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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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때 나는 아스라한 절벽 위에 위태로이 걸린 밧줄(신림시장 사람들)을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스라한 절벽 위에 위태로이 걸린 밧줄(신림시장 사람들)을 잡고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 이종찬

서울의 거리에 띄엄띄엄 서 있는 가로수가 낙엽을 투둑 투둑 떨구었다. 늘상 스모그에 포옥 잠겨 희부연 이마를 간혹 내밀던 관악산도 어느새 울긋불긋한 가을빛을 떨치고 겨울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가을인가 싶었는데, 가을은 어느새 저만치 꽁무니를 감추고 겨울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추웠다. 몸도 제법 추웠지만 마음이 너무나 추웠다. 서울 하늘 아래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겨울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정말 앞이 캄캄했다. 땡겨울에도 여간해서 기온이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는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살다가 늘상 영하로 떨어지는 서울에서의 겨울나기가 정말 두려웠다.


게다가 영등포구 신림동에 있는 사출공장을 그만둔 뒤부터 하루가 다르게 지갑이 얇아지기 시작했다.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신림동 다세대 주택 2층으로 이사를 했지만 씀씀이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방세는 들지 않았지만 집에서 밥을 해 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씀씀이는 신대방동에서 자취 생활을 할 때와 엇비슷했다.

그때부터 나는 밤마다 신대방동 전철역 둑길에 나가 담배꽁초를 줍기 시작했다. 하지만 간혹 비가 오는 날은 그 담배꽁초조차도 주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비가 오지 않는 날 밤마다 둑길에 나가 담배꽁초를 보이는 대로 모두 주워 빈 담배갑 속에 수북히 채워 놓았다. 그리고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면 화장실 변기통에 들어가 그 꽁초담배를 뻑뻑 피웠다.

서러웠다. 서울하늘 아래서 담배값까지도 절약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내 처지가 참으로 불쌍했다. 하지만 어쩌랴. 내 스스로 선택하여 올라선 이 길을 내 스스로 내려설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 어쩌면 나는 지금 터널을 지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 힘들어도 이 캄캄한 터널만 지나면 내게도 밝은 날이 다가오지 않겠는가.

"총각! 여기가 내 집이라고 생각하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부엌에 와서 밥을 챙겨 먹어. 밥하고 반찬은 넉넉하게 준비해 놓았으니까."
"체면도 없는 그게 어디 사람입니까?"
"체면? 체면이 어디 밥 먹여 주는 것 봤어? 정 그렇다면 아예 베란다에서 밥을 해 먹어. 객지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건강이 최고야."


신림시장에서 고추방앗간을 하고 있었던 그 집 주인 아주머니와 아저씨는 이른 새벽에 시장에 나갔다가 밤 9시가 지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툭 하면 사과와 감, 감귤 등을 포함한 여러 가지 먹거리를 내게 건네주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정말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밖에 나갔다가 일부러 밤 10시를 넘겨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내 방 문턱에 먹거리가 놓여져 있었다. 어떤 때는 주인 아저씨께서 일부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또 어떤 때는 주인 아주머니께서 나 때문에 아들 성적이 꽤 올랐다며 두툼한 용돈을 주기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한사코 거절했다. 그럴 때면 주인 아주머니는 그 돈을 내가 자주 들르는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맡겨 놓곤 했다.

1996년 늦가을부터 나는 종로구 낙원상가 옆에 있는 00교육원이라는 학습지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회사는 학습지 판매 방식이 조금 특이했다. 학습지를 들고 무작정 가정집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회사에서는 학습지 판매원들에게 설문사항을 인쇄한 우편엽서(요금별납)를 들고 학교 주변에 나가 학생들에게 뿌리게 했다.


"우리 회사는 일반 학습지 회사처럼 세일즈를 하는 곳이 아닙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에게 스스로 파는 발품과 학습지를 구독하는 학생 수가 비례한다는 거죠."

그랬다. 그렇게 학교 주변에서 학생들에서 엽서를 열심히 뿌리다 보면 10% 정도는 설문에 답한 엽서가 되돌아 왔다. 우리들은 그 엽서에 적힌 전화번호를 확인, 학부형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설문지에 적힌 내용을 차분히 설명하면 학습지 판매 확률은 거의 50%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렇게 한번 학습지를 구독하기 시작하면 매월 학습지를 가져갈 때마다 학생을 만나 10여분 정도 학습 지도까지 해 주었다.

언뜻 생각하면 그 일은 누워서 떡먹기처럼 쉬워 보였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 일을 시작하고 보니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말 주변이 아주 좋아야 했다. 둘째는 성격이 능글능글해야만 했다. 셋째는 그 학습지에 담긴 내용을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환하게 외우고 있어야만 했다.

처음 그 일을 시작한 나는 보름이 지나도록 계속 헛탕만 쳤다. 내 주변 사람들은 엽서를 들고 전화를 걸면 거의 100%였다. 근데 내 앞으로 되돌아온 엽서를 들고 내가 전화를 걸었다 하면 몇 마디도 하지 못하고 퇴짜를 맞거나 아예 전화가 되지 않았다. 어쩌다 겨우 학부형과 약속을 하고 가정집을 방문했다가도 번번이 퇴짜를 당했다.

"요즈음 어때? 학생들은 많이 불어났고?"
"말주변이 없어서 그런지 그게 그리 쉽지가 않네요."
"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엉긴 실타래도 하나씩 하나씩 풀어나가야 나중에 다 풀리는 거지."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 보지도 마라는 속담도 있잖습니까?"
"쯧쯧쯧. 모든 일을 총각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올라갈 나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거야. 그래, 가지고 이 삭막한 서울 바닥에서 어떻게 살아 가겠어."


신림시장 국밥집 아주머니는 혀를 차면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또한 애궂은 막걸리만 벌컥벌컥 마셔댔다. 한동안 국밥집 아주머니와 나는 말이 없었다. 마치 금세 말다툼이라도 한 사람들처럼. 그때 고춧방앗간에서 시뻘건 고추를 열심히 빻고 있던 집주인 아주머니가 나를 불렀다.

"내가 우리 동네 사는 학생들 좀 모아줄까?"
"저...정말요?"
"나는 그동안 총각 눈치만 보고 있었지."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마울 것까지는 없고. 요즈음 우리 아들 성적이 좀 오르니까 동네 아주머니들이 난리 법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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