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이씨죠?" "뉴욕 이씨입니다"

[한국에서 살아가기] '현빈'으로 다시 태어나다

등록 2004.11.09 08:30수정 2005.08.0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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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국에 갔을 때 한국 이름을 잘 몰라서 힘들었다. 한국 이름이 다 낯설었고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의 이름을 알아 듣기가 어려웠고 금방 잊어버렸다.


한국에서는 이름을 안 부르고 호칭 쓰는 경우가 많아 이름을 몰라도 큰 일이 아니지만, 또 한편으로 같은 이유로 이름을 많이 안 듣고 못 외우는 것이었다.

처음 하숙집으로 이사 갔을 때 다른 하숙생 이름을 잊어버리고 한 달 동안 모르고 살았는데 결국 공책에다가 우리집 안내도를 그렸고 화장실 옆방 누구, 앞방 누구 이렇게 적어서 하숙생들의 이름을 다 외웠다.

한국 사람도 서양 사람 이름이 다 낯설기 때문에 존이나 마이크 같은 흔히 나오는 이름 외에 이름을 한번 듣고 외우는 것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내 이름은 미국에서도 드문데, 미국 사람들도 가끔 알아 듣기가 힘들어서 발음을 잘 못하거나 내 이름만 보고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잘 모르는 때도 꽤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내 이름으로 인한 어려움은 별로 없었다. 한국말로 'v' 발음은 없기 때문에 내 이름은 Gavin으로서 'Gabin'이 됐지만 미국에서도 사람들이 내 이름을 많이 틀리게 발음해서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어 수업에서는 한글을 배우고 나서 우선 자기 이름을 쓰려고 한다. 이 일은 어떤 나라 사람에게 쉽지만 어떤 나라 사람에게는 매우 어렵다. 특히 러시아에서 온 학생의 경우는 심각하다. 예를 들면 박노자씨의 본명인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보다 '게빈 힐리'는 발음이 훨씬 쉽지 않은가?

이름을 한글로 썼을 때 처음에는 '개빈'이라고 썼다. 그러자 선생님이 나를 비웃으셨다. '개'는 'dog'라고 하셔서 개가 되고 싶어하냐고 물으셨고 차라리 '게빈'이라고 쓰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난 한영사전을 보고 '게'가 'crab'인지 알게 되었다. 게도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 선생님에게 '개'보다 '게'가 낫냐고 물어봤다. 선생님이 그렇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때부터 내 이름은 한글로 '게빈'이 되었다(사실 아직도 이름으로서 '개'와 '게'는 오십보백보라 생각한다).

한국에 도착한 지 일년이나 되어서 한국 이름을 지을까 점점 생각을 많이 했다. 이젠 한국 이름이 있는데도 친구들은 보통 나를 '게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국 이름이 꼭 필요할 때가 있어서 한국 이름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특히 패밀리 레스토랑에 갈 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난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패밀리 레스토랑은 항상 손님이 많아서 배가 고프면서 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짜증나고 맛있는 감자탕, 삼겹살 그리고 빈대떡이 있는데 패밀리 레스토랑 가는 것이 조금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밀리 레스토랑은 왠지 한국에서는 인기가 많아서 자주 친구들이 가자고 해 어쩔 수 없이 가게 될 때가 많다. 친구보다 일찍 도착하면 우리 일행이 몇 명인지 그리고 이름을 알려 주려고 하지만 대부분 '게빈 힐리'라고 하면 사람들이 다시 말씀하라고 하면서 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그 대신 한국 이름을 주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어떤 때는 내가 '박철수'가 되었고 어떤 때는 내가 '이미남'이 되었다(다른 게 아니라 내가 미국 남자니까). 그리고 부를 때 다른 손님들의 놀라는 표정을 보는 걸 좋아했으니까. 가끔 '박찬호'나 '서태지'도 되었다.

하지만 나만의 한국 이름이 있으면 더 편할 것 같아서 이름을 지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아이 이름을 지을 때 부모들이 자주 <아기 이름>과 같은 책을 본다. 이런 책을 보면 여러 이름의 어원, 의미 그리고 역사를 알 수 있다.

한국 이름을 지을 때 주로 할아버지나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짓는다고 들었다. 나는 한국인 할아버지도 없고 점쟁이에게 가면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결국 하숙집에서 이름 짓기 대회가 벌어졌다. 사실은 대회라고 하면 좀 과장하는 것이다. 하숙생 2명이 이름을 지었고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이름을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이기는 사람에게 내가 술 대접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우리 3명은 다같이 마셨고 결국 이긴 사람은 이겼다는 '명예'뿐, 진 사람과 다른 것이 없었고 특별한 상을 받지도 않았다.

대회 참가자는 대학원생인 지원과 대학생인 정진이었다.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다만 '게빈'과 소리가 약간 비슷한 이름을 선호한다고 대회 참가자에게 말했고 '힐리'와 소리가 비슷해서 성은 이씨로 미리 정했다.

누가 나에게 무슨 이씨냐고 묻는다면 나는 '뉴욕 이씨'라고 대답한다. 가문이 그리 훌륭하지 않지만 열심히 노력하겠다.

이름을 짓게 된 지원과 정진은 깊이 생각한 후 그 다음 날 발표했다. 정진이 대담하게 '빈'이란 이름을 권했다. '이빈'은 멋지다. 하지만 조금 더 평범한 이름을 선호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들이 거의 다 두 글자 이름인데 글자가 하나만 들어 있는 이름은 약간 낯설었다. 그래도 만약 지원이 괜찮은 이름을 발표하지 않다면 '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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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빈

지원은 여러 이름을 권했다. 정진이 이름을 하나만 발표해야 한다고 하고 이렇게 여러 이름을 권하는 것은 반칙이라고 했다. 나는 반칙이라기보다는 그냥 부지런함이라고 생각했지만 지원이 이름을 하나만 권해야 한다고 하면 '현빈'을 추천한다고 했다.

그렇게 추천하지 않았더라도 그 이름 중에 '현빈'은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지원이 지은 '한범'도 꽤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한국의 호랑이가 될 자신이 없다).

그 때부터 표를 예약하거나 자장면을 주문할 때 '현빈'으로 했지만 나를 현빈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내가 <오마이뉴스>에 기자 회원으로 가입했을 때 이름으로 'Gavin Healy'를 입력했다. 기사를 처음 올렸을 때 기사 제목 밑에 'Gavin Healy'가 나왔지만 조금 이따가 다시 봤더니 내가 입력했던 별명 '현빈'이 대신 나왔다.

조금 놀라왔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사 제목 밑에 '현빈'을 볼 때마다 만족스럽다. 그리고 '현빈'에게 쓴 쪽지나 독자의견을 볼 때 더욱 더 내가 현빈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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