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돌을 던지렵니다

현실 앞에서 연약했던 저 자신을 돌아보며

등록 2004.12.30 17:19수정 2005.06.29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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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고 있습니다. 새벽까지 <오마이뉴스>에서 기사를 읽다가 '2004, 나를 열 받게 한 인물'에 관한 기사 공모를 보았습니다. 순식간에 나의 골치를 앓게 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머릿속을 스쳐가고, 욕지거리 몇 가락이 침샘에 고입니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내 인생에서 혼란했던 한 해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를 괴롭힌 인물 중 으뜸은 그 누구보다 바로 '나' 자신이었습니다. 지난 1월 1일 새벽 저는 친구와 함께 종로에 있었습니다. 보신각 앞에 가득 모인 군중 속에서 타종소리를 들으며 '2004년에 내 인생 승부를 걸겠다'며 비장한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모습은 패배자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1년 전 종로에서 희망의 크기를 내기했던 그 친구에게 '술 한 잔 하자' 전화하는 것도 이제는 부담스럽습니다. 번번이 미혼인 그 친구가 주머니를 털어 술값을 냈기 때문입니다.

나는 스스로 좌파라 자부해 왔습니다. 사회 전면에 나설 용기는 없었지만 새 세상을 열망하는 청년의 이름으로 늘 거리에 있었습니다. 때로는 개선군처럼 어린 딸아이를 무동 태우고 광장을 활보하기도 했습니다. 대통령 탄핵과 이라크 파병 사태를 겪으며 사춘기의 성장통처럼 뒤늦은 가슴앓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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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탄핵 사태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진실을 볼 줄 아는 순수를 회복했다. ⓒ 김남용

그런 나에게는 언제나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자라는 오해가 고문관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하루 살아가기에도 절박한 시대에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정의나 민주라는 구호를 외친다는 것은 아무래도 사치스런 일이었을까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참된 세상을 만들려는 진정한 좌파들에 비해 저는 어쩌면 연약한 소시민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가정의 생계 문제를 핑계로 정치적인 문제들에서 벗어나자며 자신을 다그치기도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줏대 없는 삶을 살아온 것만 같습니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라는 인물이 고백할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의문이 듭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더께 낀 거울을 닦듯이 나도 이제는 나의 거울을 닦고 싶습니다. 함부로 깰 수 없는 거울이라면 한 번쯤은 몸이 닳도록 거울을 닦아보는 것도 삶에 대한 예의겠지요. 나에게는 지금이 바로 그때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나는 자신에 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자괴감과 우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야만의 악법인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위해 사람들이 여의도에 모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300여 명 단식농성단이 1000여 명으로 불어날 때까지 나는 망설였습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인생 차압딱지를 붙이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국가보안법은 참여정부에서 언젠가는 폐기될 운명일 거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12월 20일이 넘어서면서부터 나는 그동안 자신이 착각 속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왔던 독재의 이데올로기는 조금도 변한 게 없었습니다. 그들은 국가보안법이라는 낡은 유물에 기대어 국민의 개혁 열망을 호도하고, 민주화의 전리품들을 이용해 오히려 민주세력들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저주를 일삼고 있었습니다.

슬프게도 먼저 변한 것은 민주세력의 지지로 탄생한 참여정부였습니다. 독재정권이 국민의 영혼을 세뇌시켰던 그 수구적인 논리를 참여정부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상생, 민생, 경제 우선 등 추상적인 선동에 의해 개혁은 참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좌초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정권의 핵심들은 지지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데 익숙해져 갔고, 너무 일찍 주류 의식에 사로잡힌 개혁세력은 중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도 나를 배신했음을 시인합니다. 광장에, 거리에 나부끼지 않는 구호들은 실천이 따르지 않는 스팸 광고일 뿐입니다. 진보적 가치만이 나를 움직일 수 있다며 좌파임을 자부했던 나는 가짜였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는지 뒤늦게나마 동지들의 목쉰 구호가 나의 귓바퀴를 맴돌았습니다.

며칠 동안 새벽을 뒤척이다 나는 25일 성탄절 저녁 광화문 네거리에 나갔습니다. 촛불시위가 열릴 거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광화문 거리에는 수만 개의 전구들만이 잔치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동지들이 위태로운 몸을 이끌고 안산으로, 국회 앞으로 선전전을 하러 간 날이었습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로 가는 동안 내 머리는 광화문 거리의 수많은 전구들을 한꺼번에 촛불로 변신시키는 마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마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여의도에 도착했습니다. 그리도 가까운 곳인데도 이제야 찾아온 나는 먼 나라의 이방인 같았습니다.

전동차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단박에 그들이 단식농성단이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그들은 몸에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무덤으로'라는 구호가 쓰인 띠를 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 사이에 끼어 여의도 공원 단식농성장으로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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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공원의 아스팔트 광장 한켠에 섬처럼 떠 있는 단식농성장. 저 투명한 비닐집 안에 새 시대를 여는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 김남용

시베리아의 어느 사막을 연상케 하는 넓은 아스팔트 공원 한켠에 단식농성단의 천막들이 칼바람을 맞고 있었습니다. 비닐 천막들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찢겨 날아갈 것만 같았고, 얼음장 같은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도 차가운 입김을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민단식농성단 천막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의 얼어붙은 불안감은 이내 강한 연대의 기운에 녹아들고 있었습니다. 비닐 벽에 걸린 투쟁 소식들을 읽을 때는 뜨거운 무언가가 심장에서 울렁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전선'의 감동이었습니다.

나는 구석에 짐을 풀었습니다. 농성장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밤 10시가 가까워지면서 금세 뜨겁게 뭉친 결정체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11시가 되어서는 거의 빈자리가 없었습니다. 거리로 선전전을 나갔던 단식농성자들이 돌아온 것입니다.

동지들의 얼굴은 표정이 없는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동지들의 몸짓은 느리고 목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작았습니다. 그네들 대부분이 보름께 단식을 하고 낮에는 선전전과 집회에 참여하는 강행군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농성장에 들어오자마자 자리에 눕는 사람도 있었지만 동아리로 모여 토의를 하는가 하면 책을 읽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자정이 지나면서 농성장은 침묵이 흐르고 전등불도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정신은 더 밝은 등을 켜는 것 같았습니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잠들기를 포기하고 배낭에서 황대권씨의 <야생초 편지>와 손전등을 꺼냈습니다. <야생초 편지>는 벌써 읽은 터였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해 챙겨 온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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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피해자이기도 한 황대권씨의 <야생초 편지>를 밤새 꺼질듯한 손전등에 의지해 읽었다 ⓒ 김남용

이 책의 저자는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서른 살 때부터 마흔네 살까지 무려 13년 2개월을 간첩이라는 오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 있었으니까요.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이 책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야생초 관찰일기이지만, 실은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한 젊은이가 타율과 감시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했던 생명의 몸부림이기도 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달개비, 닭의 덩굴, 딱지꽃, 돌콩, 쇠비름, 명아주처럼 남들에게는 풀일 뿐인 야생초들이 저자에게는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이 하찮은(?) 것들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을 줄 아는 순수한 사람을 국가는 짓밟고 고문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한 국가보안법 피해자가 가꿔놓은 야생초밭에서 싱싱한 진리를 뜯어먹으며 아침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나는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갑작스런 환경 변화에 적응이 안 된 탓인지 머리가 아프고 몸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천막 안에 진동하는 석유 냄새는 내가 숨을 쉴 때마다 머리를 콕콕 찔렀습니다. 더구나 밤새 불편한 자세로 책을 읽느라 허리까지 욱신거렸습니다. 하루아침에 병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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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농성단은 아침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했다 /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구보하는 청년학생들 ⓒ 김남용

정신을 차려보려고 밖에 나가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동지들은 구보를 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몸을 움직여 봤지만 좀체 뭉친 기운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찬 기운에 몸도 덜덜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서둘러 농성장 안으로 들어와 침낭 속에 몸을 숨겼습니다. 단식을 시작한 지 불과 몇 시간만에 꾀를 부리는 내 모습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오전 9시쯤 조례가 열리기 전까지 나는 그렇게 천막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단식농성자들이 천막 안에 빼곡히 들어선 가운데 조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이 단병호 의원을 비롯한 민주노동당 소속 의원들이 농성장을 찾아와 차례로 결의를 다졌습니다.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다짐하는 의원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단식농성자들은 박수로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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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아침 조례시간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방문해 결의를 다졌다 / 국보법을 반드시 연내에 폐지하겠다 약속하는 노회찬 의원 ⓒ 김남용

26일 일정은 크게 수도권지역 단식단의 안산 선전전과 지방 단식단 대표의 전북 정읍 방문, 그리고 저녁 때 촛불시위 참여였습니다. 나는 간밤의 무력감을 만회하기 위해 정읍 방문단을 따라나서기로 했습니다. 정읍으로 가는 45명의 동지들 중에는 21일 동안 단식투쟁을 한 분들이 1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일 릴레이 단식에 참여한 나에게는 참으로 과분한 동행이었습니다.

12시 조금 넘겨 단식농성단을 태운 버스는 여의도를 떠나 정읍으로 향했습니다. 평소 같으면 도시를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소풍 가는 기분이 들었겠지만, 버스 안에는 동지들의 숨소리마저 무진(霧津)을 넘어가듯 낮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단식농성단이 위태로운 몸을 이끌고 정읍에 가는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국가보안법 연내 처리의 열쇠를 쥔 김원기 국회의장의 정치적 고향이 정읍입니다. 정읍은 작은 도시지만 민중 봉기와 저항을 상징하는 땅이기에 그 지역 사람들의 정서에 호소하고, 연대를 모색하러 간 것입니다. 아무리 시대의 사명을 외면하고, 불합리와 타협하는 위정자라도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면 각성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후 3시 30분쯤 정읍 시청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니 손님맞이를 하려는지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남쪽이라선지 여의도의 칼바람이 그곳까지 따라오지 않았더군요. 미리 합류하기로 약속한 전북·정읍 지역 민주연합 동지들과 농민회 대표단이 단식농성단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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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전북 정읍 김원기 국회의장 후원회사무소 앞에서 항의시위하는 단식농성단 ⓒ 김남용

우리는 선전전에 쓸 피켓과 전단을 나눠들고 서둘러 김원기 국회의장 후원회 사무소로 이동했습니다. 사무소 앞에서 항의시위를 하고 시내로 나가 선전전을 한 다음 저녁 촛불시위에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단식농성자들이 일정대로 거리 선전전에 나선 사이 단식단 대표들과 지역 일꾼들은 후원회 관계자에게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휴일인데도 사무소 문이 열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무소에 있던 직원들은 책임자가 없다는 이유로 면담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곧 내부 사무실에서 정무수석비서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단식단 대표들이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위해 정읍까지 내려온 우리의 의지를 의장께 전달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 관계자는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못했습니다. "4자회담이 진행 중이니 기다려 보자"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약속이 있다며 자리를 떠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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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기 국회의장 후원회사무소에서 정무수석비서관과 면담하고 있다. 하지만 21일째 단식한 청년들 앞에 그가 내놓은 것은 국보법 폐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귤'이었다. 그는 몇 가지 핑계를 댄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 김남용

단식단 대표들과 지역 일꾼들은 신속히 간담회를 열었습니다. 단식단은 지역 단체에서 조금 더 강하게 여론을 움직여 줄 것을 부탁했고, 지역 사회단체로서는 시급한 지역 현안을 처리하는 데 집중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서울에서 '4자회담 결렬' 소식이 날아들자, 순식간에 '점거농성'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김원기 국회의장의 결단뿐이었으니까요.

그때까지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만 보던 나는 이 소식을 <오마이뉴스>에 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미처 준비를 하지 못한 탓에 찍은 사진을 전송할 길이 없었고, 전화로만 '26일 6시 김원기 국회의장 후원회사무소 점거농성'이라는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정읍 시내 중심가에서 예정된 촛불시위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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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농성단과 지역 사회단체, 그리고 300여 명의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하고 있다. 이 날 한상렬 통일연대 상임의장도 집회에 참석해 국가보안법을 끝장내자며 열변을 토했다. ⓒ 김남용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위한 촛불시위에는 300여 명의 지역 사회단체 관계자와 시민들이 참여했습니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도 보였습니다. 어느새 지역에서도 가족이 참여하는 시위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밤이 되어 더욱 쌀쌀해진 날씨 속에서 분투하는 단식농성단의 모습은 그 어느 촛불보다도 뜨거워 보였습니다.

촛불시위가 끝나고 다시 김원기 의장 후원회사무소 앞에서 정리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7시 40분경 단식농성단은 지역 시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날까지 점거농성을 이어가기 위해 전주·완주연합의 박기수 대표를 비롯한 일부 단식농성단은 그곳에 남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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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를 마치고 다시 김원기 국회의장 후원회사무소 앞에서 정리집회를 하고 있다. 점거농성 중인 오른쪽 건물 4층에서 촛불이 번져 환하다. ⓒ 김남용

서울로 돌아오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대화를 하지 않았습니다. 짧게는 보름, 길게는 20여 일을 단식하면서도 계속 강행군을 했기에 입을 열기도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내일의 투쟁을 위해 조금이라도 에너지를 아끼려는 공동의 침묵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 침묵을 깨버린 건 바로 나였습니다. 서울 요금소를 막 지났을 때 아내에게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고, 나는 무심코 "12시 이전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거야"라는 말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입니다.

아내가 "정말 아무것도 안 먹은 거야? 그러다 쓰러지면…" 이런 우려 섞인 물음을 쏟아낼 때서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더니. 아아, 이런 철없는 가벼움을 어쩐다 말인가.

밤 11시에 여의도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다리가 풀렸는지 몸이 제멋대로 건들거렸습니다. 농성장으로 가기 위해 빙판으로 변한 아스팔트를 가로지를 때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습니다. 날카로운 달빛에 비친 내 그림자…. 머리는 해골이요, 몸은 문어발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닐 천막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석유 냄새가 나의 비위를 자극했습니다. 그때서야 잊고 있었던 몸살 기운이 나를 무차별 공습해 왔습니다. 무엇보다 낯선 배고픔이 숙련된 고문기술자처럼 나의 배를 고문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나의 한계였을까요? 나는 한꺼번에 몰려오는 생존의 욕구에 못 이긴 척 배낭을 짊어지고 도망치듯 천막을 빠져나왔습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가 차려준 밥상을 굶주린 점령군처럼 허겁지겁 들쑤셨습니다. 그리고 24시간의 단식 체험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자리에 눕고 말았습니다. 나는 그 후 나흘 동안이나 몸으로 마음으로 앓아야만 했습니다. 잃어버린 청년정신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에서 나는 끝내 패배하고 만 것입니다.

오늘은 동지들이 끝장단식에 들어간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나마 생명을 지탱해 주던 소금과 물도 거부하고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칼바람에 맞선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글을 쓰다 보니 숨 가쁜 시기에 어울리지 않는 장문이 된 것 같습니다.

국가보안법은 꼭 폐지되어야 합니다. 국가보안법이 어떤 법입니까? 과거를 보지 않고 미래만 보더라도 이 법은 광기 그 자체입니다. 권력을 이용해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을 지배하겠다는 논리는 사이비 종교의 교리보다도 천박한 폭력입니다. 이러한 폭력의 군림에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엄성을 포기하는 일입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의식주보다도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양심의 자유입니다.

이곳 도봉산 자락에서도 과거로 흘러가는 '이상한 섬' 여의도에 동지들이 피운 불씨가 보입니다. 당신들의 촛불이 꺼지지 않는 한 국가보안법은 곧 끝장날 것입니다! 나의 부끄러운 연대기도 국가보안법과 함께 저 아득한 무덤으로 돌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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