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다시 출발!

공사중인 인생에 못 하나 더 박았습니다

등록 2004.12.31 11:20수정 2005.01.0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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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이 된 아줌마가 이력서를 쓰는 일은 색다른 경험입니다.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한 애절한 구직이 아니고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기 위한 배부른(?) 시도기 때문에 더욱 즐겁게 여겨지는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 모처럼 이력서를 쓰게 되었습니다. 물론 자기소개서도 장황하게 쓰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도 떼는 유쾌한 경험이었습니다.

아직은 고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흔을 훌쩍 넘긴 아줌마는 행복했습니다. 이력서를 쓰다 보니 대학을 갓 졸업했던 20대 때보다 이제는 학력이나 경력난도 더 길어졌더군요.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늘어난 학력이나 경력만큼 내 인격이나 교양의 깊이도 늘어났을까. 과연 내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 내 인생에 훈장을 줄 만한가.'

물론 제 대답은 자신 있게 '아니요'였습니다. 그리고 때가 때인 만큼 숙연하게 이러저러한 단상에 잠기면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더군요.

'불혹의 나이를 지났으면서도 나는 아직도 미혹되고 유혹 앞에서 초연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사소한 일에 분노하고 눈에 쌍심지를 켜기도 한다. 도대체 내 나이에 걸맞은 반응을 보일 그 때는 과연 언제쯤일까.'

'이제 웬만큼 세월의 더께가 쌓였으면 아이들과 남편에 대해 자비와 긍휼을 베풀기도 하련만 나는 여전히 성마르고 관대하지 못하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세월이 더해져야 초탈하듯 그들 앞에 성자처럼 설 수 있을 것인가.'

'늘 부족해서 아쉬워하고 그 아쉬움을 채우려 아등바등 애쓰고, 그런 분투가 집착과 욕심을 낳고, 또 다른 부족을 아쉬워하는 이런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인생'을 도대체 언제까지 살 것인가.'

세밑에 밀려오는 회한과 아쉬움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돌이켜보면 이런 회한의 시간은 제 인생에 늘 습관처럼 반복되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 어쩌면 무덤에 가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이만큼 나이를 먹었으면서도 제 인생은 여전히 '공사중'인 것이죠.

'쎄 라 비 C'est la vie!' (이것이 인생)

이렇게 무기력하고 허물 투성이인 '한계 인생'이 바로 제 인생입니다.

이제 묵은 해를 보내면서 그동안 감추고 높이려 했던 저의 허물을 새삼 돌아봅니다. 그리고 교만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저를 돌아보는 경건의 시간도 가져봅니다.

2004년 마지막 날인 오늘, 제가 좋아하는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를 소리내어 읽습니다. 다가오는 새해가 여러분 모두에게 의미 있는 행복한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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