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비의 무덤, 구렁이가 지키더라

이 겨울, 공릉 무덤마다 구렁이가 겨울잠을 자고 있다

등록 2004.12.31 19:36수정 2005.01.0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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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순왕후의 공릉은 석물은 단출하지만 능상은 왕릉보다 훨씬 크다. ⓒ 한성희

공릉에는 구렁이가 산다. 그것도 작은 구렁이가 아니다. 그들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키며 살고 있다.

'무슨 전설의 고향 같은 소리람?'

처음 구렁이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근처에 사는 친구들로부터 공릉에 능을 지키는 커다란 구렁이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겁을 먹었던 기억이 났다.

얼마나 큰지 굵기가 어른 팔뚝만하고 사람 허리를 칭칭 감을 정도라나? 산처럼 커다란 무덤을 큰 구렁이가 지킨다니 경외심도 생기고 무섭기도 해서 소풍을 가더라도 무덤 근처에는 안 갔던 생각도 났다.

그것도 어릴 때나 믿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들려주던 -구렁이가 허물 벗고 예쁜 여자로 변한다든지, 까치를 구하기 위해 남편 구렁이를 죽인 선비의 허리를 칭칭 감고 복수했다는 등-'전설 따라 삼천리'를 믿지 않을 나이가 되자, 어릴적 거짓말쯤으로 치부했었다.

또 어른들에게 집을 지키거나 터를 지키는 구렁이가 있다는 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믿지 않았다. 예전 농촌 가옥들이야 초가지붕이고 숲이 옆에 있으니 뱀이 살기 알맞은 환경이어서 그랬겠지. 파충류 두뇌 용적이야 뻔한데 그 나쁜 머리로 무슨 터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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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혜왕후 순릉. ⓒ 한성희

그런데 요즘 같은 시대에 공릉에 구렁이가 산다니? 그것도 능마다 커다란 황구렁이가 있단다. 오씨 아저씨에게 그 소릴 처음 듣고 흥분해서 정말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얼만큼 커요?"
"이 정도 될까?"

양팔을 벌리는 걸 보니 1.5m 정도 된다. 그럼 우리나라 뱀 치곤 무지 큰 거다.

"굵기는요?"
"이 정도 될 거야."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둥글게 벌리는 걸 보니 지름이 5~6cm 정도 된다. 오씨 아저씨는 특공부대 상사 출신의 50대 후반이고 공릉에서 관리 일을 한 지 3년 정도 됐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허황한 얘기를 할 사람은 아니지만 그 얘기를 그대로 믿기엔 좀 미심쩍었다.

"색깔은요?"
"누르스름하지. 거무스름한 것도 있고."
"공릉, 순릉, 영릉, 세 능 구렁이가 다 같아요?"
"조금 다르지만 비슷비슷하게 생겼어."

"몇 번이나 보셨어요?"
"서너 번 봤지. 자주 안 보여. 영물이여, 영물. 올해는 박 소장 혼자 봤다던데? 윤기가 좔좔 흐르더라는데."

박 소장이 봤다구? 그렇다면 이제 전설 따라 삼천리인지 아닌지 확인 절차만 남았다. 이곳 공릉에서 관리 일을 하는 아저씨들은 대개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 아저씨들이다. 공릉에 다닌다고 해도 아저씨들을 자주 보진 못한다. 아저씨들은 주로 경운기에 기계나 삽을 싣고 넓은 숲 어디론가 일 하러 나가기 때문에 마주칠 기회가 별로 없고, 간혹 지나가다 만나면 인사를 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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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상 공릉 관리소장이 목격한 구렁이가 나온 구명. ⓒ 한성희

"여기 구렁이 산다면서요? 올해에는 소장님만 봤다던데요?"

관리사무소로 들어가 박 소장에게 물으니 11월 초순에 영릉에서 봤단다. 그것도 혼자 본 게 아니고 찾아온 방문객과 함께 봤단다. 얼마나 잘 먹었는지 기름기가 자르르 도는 굵기 4cm 정도에 길이 1m 정도 되는 통통한 황구렁이라고 한다. 소름이 쫙 끼친다.

"원래 무덤 주변에는 예전부터 뱀이 많아요. 능 뒤에 숲이 있으니 뱀이 서식하기 알맞은 곳이지요."

그래도 박 소장에게 가보자고 졸랐다. 나뭇가지를 꽂아 표시해 두었다는 구렁이 나온 곳을 찾아가 기어코 사진을 찍었다. 영릉 능상에서 내려오는 언덕이다. 그 바로 아래가 제일 명당 자리라고 하던 자리다. 박 소장에게 확인했지만 그래도 어쩐지 미흡했다.

만나는 아저씨들마다 하나씩 붙들고 캐묻기 시작했다. 제일 나이가 많은 권씨 할아버지부터 시작했다.

"능에서 일할 때 몇 번 봤지. 잘 안 드러내요. 안보여도 허물은 해마다 벗어놓고 들어가."
"다 누런 구렁이예요?"
"누런 것도 있고 검정 먹구렁이도 있어."
"크기는요?"
"다 이 정도는 되더라구요."

권씨 할아버지가 벌리는 팔의 크기를 가늠해보니 1.3m 쯤 된다. 구렁이가 있긴 있는 모양이네? 살모사 같으면 사람을 무니까 잡아 없애지만 구렁이는 쫓아버리지, 사람에게 해를 안 끼치기 때문에 잡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가 가버리자 이번엔 작업반장인 강씨 아저씨가 지나가는 것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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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 한성희

반장 아저씨는 50대 후반에 안경을 낀 점잖은 분이다. 조용조용하며 차분하게 묻는 말에 대답해준다.

"구렁이는 봤지요. 공릉에는 흑구렁이와 황구렁이 두 마리 있어요. 다른 곳은 황구렁이 한 마리씩 있더라고요. 올해는 못 봤어요."
"올핸 박 소장님이 영릉에서 봤데요."

"능에는 산이 옆에 있어서 원래 뱀이 많아요. 구렁이 한 쌍이 새끼를 치면 일년이면 얼마나 늘어나겠어? 올핸 영릉 정자각 옆에 허물 벗어놓은 건 봤는데."
"언제요?"
"가을이지 아마. "

헉! 그 뱀 허물은 나도 봤다. 갈기갈기 찢겨져 조각만 조금 남은 상태라 설마 커다란 구렁이 허물일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이쯤 되자 구렁이 실체가 갑자기 다가오면서 소름이 끼친다. 그래도 호기심과 궁금증은 더해간다. 이놈의 호기심이 항상 문제다.

"이젠 능상에 겁이 나서 못 올라가겠네요."
"구렁이는 사람 안 물어요. 하긴, 여자들은 무서워도 하겠지."

따로따로 아저씨들을 만나서 들은 얘기를 종합해보니 능구렁이들의 굵기는 직경 4cm 정도이고 1m에서 1.5m 정도 길이가 되는 듯싶다. 공릉에서 일한 지 3년 이상 된 아저씨들은 서너 번 정도 봤다고들 하니 그리 자주 본 건 아닐 거고, 그 넓은 능을 황구렁이 한 마리가 왔다갔다하진 않을 테니 능마다 있다는 것도 사실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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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소령원 묘에서 내려다 본 잔디 언덕이 구불구불 구부러져 신비롭다. ⓒ 한성희

며칠 뒤, 소령원에 갔을 때 그곳을 관리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여기도 구렁이 있어요?"
"그건 왜 물어요?"

할아버지는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힐끗 쳐다보더니 퉁명스레 내뱉는다.

"공릉에 있다고 하기에 여기도 있나 해서요."
"공릉에 누가 그래요?"
"오씨 아저씨랑 반장 아저씨, 권씨 할아버지 다 그러던데요? 있어요?"
"있지. 소령원과 수길원에 한 마리씩 있어요."

소령원에서 혼자 살며 관리하는 이 할아버지는 더 이상 입을 열려고 하지 않는다. 좀 괴짜이긴 하지만 소령원과 수길원을 무척 아끼고 자랑스러워한다. 소령원과 장릉도 문화재청 파주지구 관리소 관할이라 공릉 아저씨들이 일을 하러 가곤 한다.

아저씨들은 구렁이 얘기를 물으면 왠지 흔쾌하게 대답하려 들지 않는다. 숲이 있는 곳은 구렁이나 뱀이 많다는 둥 하다가 나중에 조심스럽게 꼭 덧붙인다. 능 지킴이라 절대 잡으면 안 된다는 말을.

어쨌든 한 사람씩 붙들고 물어본 결론은 능마다 구렁이가 있다는 것이다. 늘상 숲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누구보다 구렁이를 볼 확률이 가장 클 것이다.

아저씨들이 사무소 옆에 모여 있는 걸 보고 다시 구렁이 얘기를 꺼냈다. 가뭄이 든 해에 영릉 능상 잔디에 호스로 물을 줄 때, 물이 들어가니까 구렁이가 나오더란 얘기를 한다. 푸른 잔디에 슬금슬금 커다랗고 누런 구렁이가 기어가더란 말을 들으니 능상에 올라갈 생각이 없어졌다. 장릉 관리하는 할아버지가 구렁이를 봤는데 무척 컸다는 얘기도 들려준다.

"영릉 구렁이가 얼마나 컸어요?"
"아침에 영릉에 가니까 구렁이가 머리를 구멍에 들이밀더라고."

볼 때마다 구렁이 얘기를 몇 번이고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물으니 반장 아저씨가 좀 성가셨는지 놀리고 싶었나보다.

"그런데, 저녁에 가보니 그제서야 꼬리가 들어가더라구. 그러니 얼마나 크겠어."
"네?"

아침에 머리가 들어가기 시작해서 저녁에 꼬리가 들어갈 정도로 큰 구렁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며 시치미 떼는 반장아저씨 말에 옆에 있던 오씨 아저씨가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건 내 눈엔 안 보일까?"

분하다는 듯이 말하자 오씨 아저씨가 가소롭다는 듯 힐끗 쳐다본다.

"몇 년 돼도 한번 볼까말까 한데 겨우 몇 달이나 다녔다고 보이나? 박 소장도 삼 년만에 처음 본 건데."

공릉이나 소령원, 장릉에서 일하는 아저씨들의 공통점은 능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다. 왕비와 왕의 무덤이라 경외심을 갖는 것도 보인다. 그리고, 내색을 잘 안 하지만 구렁이도 아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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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가 뒤진 흔적이 있는 영릉 사초지. 뱀이 땅 속으로 구불구불 기어간 흔적 같이 보였다. ⓒ 한성희

그 이후 겁이 나서 능상에 얼마동안 혼자 올라가지 못했다. 두더지가 파고 지나간 자리가 구렁이가 땅 속으로 기어간 흔적 같아서 겁을 집어먹었고, 그러다가 구렁이 꼬랑지라도 확 밟으면 어쩌나 해서 발바닥에 이상한 감촉만 와도 머리털이 곤두서고 화들짝 놀라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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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 숲 흙에 파인 구멍. 설마 뱀구멍은 아니겠지. ⓒ 한성희

숲을 걷다가도 땅에 구멍이 난 것을 보면 혹시 뱀이 기어 나오지 않을까 경계했다. 이러니 정작 구렁이를 봐도 사진을 찍을 용기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온몸이 굳어져서 카메라 셔터는커녕 꼼짝도 못하고 눈앞이 하얗게 변할 거 같다.

뱀이 서식하는 건 생태환경이 알맞아서 그렇다고 하지만 왜 하필 구렁일까? 그것도 굵은 구렁이라니. 이 부분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구렁이는 냄새가 지독해서 구렁이 근처에 다른 뱀이 서식하지 못한다고 하나, 능마다 다른 뱀은 없고 구렁이만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 겨울, 공릉 무덤마다 구렁이가 겨울잠을 자고 있다. 어릴 때 들었던 팔뚝만한 공릉 구렁이 이야기는 진실이었다. 다만 그것이 왕과 왕비의 무덤을 지키고 있는 신비로운 존재인지, 구렁이 살기 좋은 곳이라 자리잡은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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