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더 좋은 방송으로 다시 찾아뵙겠다"

[현장] iTV 마지막 방송 31일, 노조-회사측 각각 고별행사

등록 2004.12.31 22:02수정 2005.01.01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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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V 노조원들이 이날 행사를 마친 후 방송 정지의 슬픔을 나누고 있다. ⓒ 김덕련


2004년 한해가 저무는 31일 오전 인천시 학익동 경인방송(iTV) 본사. iTV는 이 날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방송을 하지 못한다. 지난 21일 방송위원회 지상파 재허가 추천심사 최종발표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이날 그동안 '공익적 민영방송 실현'을 기치로 내걸고 iTV 경영정상화 투쟁을 벌여왔던 노조의 심정은 남달랐다. 더욱이 회사측의 직장폐쇄 조치가 내려진 13일 새벽 이후 본사 건물조차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했던 노조원들은 회사 거부로 고별방송마저 하지 못한 채 건물 밖에서 정파의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오전 9시 30분 노조 관계자들은 서해가 내다보이는 본사 앞에서 자체 고별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30명 안팎의 노조원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고별행사 사회를 담당한 이상희 아나운서가 눈에 띄었다. 한쪽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다.

이 아나운서는 "7년 넘게 몸담은 방송사가 문 닫는데 아쉽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는 말로 첫 인사를 건넸다. 그는 "만성부족에 시달리던 인력구조에서도 iTV 구성원들은 열정을 바쳤는데 이제 퇴직금도 안 주고 나가라는 형국"이라며 대주주인 동양제철화학을 비판했다.

고별방송 관련 언론보도에 불만을 토로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한 조합원은 "직원간 충돌을 우려해 고별방송을 취소했다는 회사측 보도자료를 그대로 받아쓴 언론이 많았다"며 "가족들과 함께 모이는 이런 자리에서 물리적 충돌이 있을 거라는 게 말이 되냐"고 지적했다.

"겨울잠은 언젠가 깨게 마련"

오전 10시 30분. 200여명의 노조원과 가족들, 출연자들이 모여들었다. 유형서, 이상희 아나운서가 고별행사 시작을 알렸다. 첫 순서로 그동안 iTV에 열정을 바쳐온 구성원들이 직종별로 나와 소회를 밝혔다.

김성현 PD는 "이 자리의 마음을 잊지 말자"며 "다시 방송하게 되는 날엔 이렇게 추운 바깥이 아니라 따뜻한 곳에서 모이자"고 말했다. 공채 1기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용수 기자는 "방송국 건물이 세워질 때 의자와 책상을 나르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회상한 뒤 "이젠 희망을 이야기하자"고 되레 힘을 북돋웠다.

뒤이어 발언한 하정호 기술감독은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가족을 두고 혼자 나왔다"며 "가족과 함께 밝은 모습으로 모일 수 있는 날이 곧 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후 이태권 프리랜서 PD와 연기자 이동우씨가 그간 구성원들의 수고를 격려했다. 김유진 방송작가는 자신의 소회를 담은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유형서 아나운서도 "고별이 아니라 휴무고, 겨울잠은 깨어나기 마련"이라고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애국가 4절까지 듣고 싶을 만큼 정파 막고 싶었다"

11시 12분.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노조가 본사 정문 앞에 설치한 대형 전광판에 이날 iTV의 마지막 프로그램인 <사랑 릴레이, 함께 하는 세상>이 끝나고 전파가 중지되는 모습이 비쳤다.

노조원들과 가족, 작가, 연기자 등의 눈에는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가득 고였다. 애국가마저 끝나고 '지지직' 소리와 함께 방송이 멈췄다. 눈물 보이지 말자던 이상희 아나운서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은 결국 눈물을 흘렸고 주저앉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전파가 중지된 뒤 마이크를 잡은 iTV 시청자 김향용(40)씨는 "정파된다는 말을 들은 후 눈물을 흘렸다"며 "인천 시민이 있는 한 iTV는 부활할 것"이라고 관계자들을 격려했다. 정호식 한국방송PD연합회장은 "애국가가 1절에서 끝날 때, 난생 처음으로 4절까지 다 듣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는 말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지막으로 이훈기 전국언론노동조합 iTV 지부장을 비롯한 전 조합원들이 앞으로 나와 노조 입장을 발표했다.

이 위원장은 먼저 시청자들에게 사과하고 "나를 낭만적 혁명가라고 부르는 말도 들었고 일각에서 노조가 강성이어서 이런 상황이 초래됐다고도 한다"면서 "그러나 우리는 공익적 민영방송을 위해 사심 없이 노력해왔다"고 말했다.

조합원들은 입장 발표 후 '희망의 편지'를 적어 정문 앞에 놓인 벚꽃나무에 걸었고 '사랑의 장미'를 정문에 붙였다. '사랑의 장미'는 투병 중인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보도국 소속 기자 2명을 돕기 위한 행사였다. 이날 두 시간 동안 계속된 iTV 노조의 고별행사는 '희망의 편지'와 '사랑의 장미'를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다음은 iTV 노조원들이 본사 정문 앞 벚꽃나무 가지에 매단 '희망의 편지' 중 일부이다.

"iTV와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들을 기억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염원할 때 iTV는 다시 시청자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iTV, 잊지 않겠습니다."
"벚꽃아, 벚꽃아! 네가 꽃필 때 나도 함께 보자꾸나!"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꼭 다시 만나서 좋은 방송합시다."


한편, 박광순 대표이사 직무대행과 비조합원 80여명은 방송국 1층 스튜디오에서 노조와 별도로 종무식을 가졌으며 양측 행사 모두에 참여하지 않은 채 서성이는 직원들도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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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중지된 후, 노조가 준비한 전광판에 노조원들의 결의와 소망이 담긴 문구가 비춰지고 있다. ⓒ 김덕련


"유치원마저 못 보낼 때 마음 아팠다"
[인터뷰] iTV 광고담당 직원 부인 서은희씨

▲ 노조의 고별행사장에 나온 김장렬-서은희씨 가족.
ⓒ오마이뉴스 김덕련
iTV 노조원 가족들은 바닷바람이 거세게 부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오마이뉴스>는 이날 현아(7)·현지(5)의 손을 꼭 잡고 남편 김장렬(38·광고담당)씨와 함께 나온 서은희(30)씨를 만났다.

- 남편도 조합원인가.
"그렇다. 남편은 회사측이 소송을 제기한 64명 중 하나다.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틀 뒤 회사측이 제기한 업무방해금지가처분신청 소장도 받았다."

- 감회가 어떤가.
"안타깝다. 폐업과 정파가 너무 갑작스럽게 이뤄져 더 그렇다. 개국 때부터 일해온 남편이 하루 아침에 해고자가 된 것도 걱정된다."

- 생활은 어떤가.
"많이 힘들다. 회사측이 퇴직금을 바로 지급하겠는가. 남편이 오늘부로 해고자가 됐으니 실업급여를 신청할 예정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안될 게 뻔해 식당일이라도 알아볼 생각이다."

- 앞으로도 계속 힘들 것 같은데.
"어쩌겠나. 견디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져 아이들이 다니던 유치원마저 그만둬야 할 때 가장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그간 살던 사원아파트에서도 나와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 맘이 편치는 않다."

-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인가.
"끝까지 싸울 것이다.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정으로 웃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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