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과거에 묶어 놓고 칭송하기

[특집] 한국사회의 나이차별 3 "너 몇 살이냐?"

등록 2005.01.03 11:06수정 2005.01.03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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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얼개가 쉴 새없이 새로 짜이면서 이제 그 달라진 얼개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점차 주변으로 밀려나는 세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어른의 자리를 잃고 새로운 역할을 찾기 어렵게 된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사정이 그러하다. 그렇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 ‘어른에 대한 공경’이라는 말은 더는 울림을 주지 못한다. 공경의 대상이기는커녕 이제 노인들은 점점 더 제도적 차별과 문화적 비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제도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마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정년퇴직’, 즉 은퇴를 강제하는 관행이야말로 나이에 근거한 차별의 대표적 예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일할 권리’를 보증해 준다고 믿지는 않는다. 사안에 따라서는 특정한 권리를 누리기 위한 자격의 정도에 있어 어느 정도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의의 대상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백번 양보하더라도 정년퇴직의 경우와 같이 개인적 능력이나 자질, 성취 등과는 무관하게 단순히 나이가 개인의 일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박탈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실제로 강제적 은퇴의 관행은 이미 서구를 비롯한 다수 나라들에서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사실 은퇴라는 제도만큼 근대가 추구해 온 ‘도구적 합리성’의 ‘불합리성’을 잘 보여 주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사람을 단지 생산성의 극대화를 위한 ‘자원’으로 보는 도구적 시각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

노인들은 이제 사회로 진입하는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식의 ‘사회의 기능적 조화’에 대한 강조는 또 얼마나 개인의 인권을 도외시하는 전체주의적 발상인가? 그렇게 보면 아직도 정년퇴직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우리 인권의식 수준은 이러한 ‘무한 성장에 대한 집단적 욕망’을 뿌리내리고 또 지속적으로 부추겨 온 오랜 독재체제의 역사적 그늘에서 우리가 아직 못 벗어났다는 증거가 아닐까?


a 후기산업 사회에서의 노년의 문화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이제 삶의 의미가 증발해 버린 일종의 '문화적 황무지'로 비하되고 있다.

후기산업 사회에서의 노년의 문화는 공적 담론의 장에서 이제 삶의 의미가 증발해 버린 일종의 '문화적 황무지'로 비하되고 있다. ⓒ 인권위 김윤섭

문화적 측면에서 보면 노년차별 현상의 배후에는 이러한 ‘무한 성장’을 향한 욕망이 함축하고 있는 ‘풍요’와 ‘근대적 세련됨’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망과 강박이 자리잡고 있다. 즉, 노인이라는 사회적 범주는 점차 모종의 서구적인 풍요와 세련의 강박에 시달리는 우리 사회가 일종의 ‘초라함’이나 ‘촌스러움’을 투사하는 대상, 곧 우리 시대의 타자가 되고 있다.

영상매체는 이 과정에서 선도적 역할을 하며, 그 대표적인 예로 몇 년 전에 방영되었던 '좋은 세상 만들기'라는 TV프로그램의 한 코너인 ‘장수퀴즈’를 들 수 있다.


이 코너에서 제시되는 문제는 제도교육을 받고 근대적 부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하지만 농촌의 노인들에게는 생소할 수밖에 없는 단편적 지식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도 쉽게 답할 수 있을 만한 문제에 대해 출연자들이 제시하는 엉뚱한 답은 방청객들의 폭소를 유발하며, 시청자들은 이 과정에 별생각 없이 동참함으로써 노년 타자화의 ‘공범’이 된다.

‘장수퀴즈’는 농촌 노인을 대접하는 프로그램이라는 외양을 하고는 있지만 정작 출연 노인의 속성으로 규정되는 특성은 ‘모자라는 근대적 지식과 판단력’, ‘세련되지 못한 매너’ 등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촌스러움’이다. 농촌 노인이란 단지 이러한 특성들을 투사하기에 적합한 대상으로 선정되었을 따름이다.

이런 프로그램에는 일면 ‘우리’는 잃어버렸으나 ‘노인들’은 아직 지니고 있는 ‘훼손되지 않은 순박함’에 대한 향수의 감정이나 애정 어린 시선이 종종 묻어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향수나 칭송의 대상이 되는 노인들은 유난히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 그려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 묶어 놓고 칭송하기’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타자화의 경향성은 흔히 타자를 특정한 미적 존재로 신비화하고 향수의 대상으로 삼지만, 동시에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지고 아직 합리성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존재로 그려낸다.

요컨대 그 ‘순박한 노인’들은 근대적·서구적·도시적 세계에 존재하는 ‘세련된 나’의 차별성을 확인하기 위해 설정된 과거에 고착된 타자이다. 이러한 타자화의 경향성은 노년의 부정적 모습에 대한 방송의 과도한 시선집중과 함께 이미 점차 연민이나 비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노인들에게 또 하나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칠한다.

그렇지 않아도 후기산업 사회의 문화는 노년의 삶에 걸맞은, 혹은 노년의 생애과정에 고유하게 추구할 수 있는 삶의 가치나 의미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공적 담론의 장에서 노년은 이제 삶의 의미가 증발해 버린 일종의 ‘문화적 황무지’로 비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년에 대한 일상적·제도적 차별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화적 차원에서의 노년 비하와 타자화가 어떻게 노인들을 단지 연민과 수혜와 회피의 대상으로 격하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노인이 우리 사회에서 당당한 인권의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작업이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하는 월간 <인권> 1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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