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5.01.31 18:26수정 2005.01.3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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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새 야간 경비를 끝내고 소대본부로 귀대, 아침식사를 끝내자 군의 반복적인 생활과 지루함에 조직 특유의 무료함이 발동했다. 그래서 오전 취침 일정을 마다하고 몇몇 의기투합한 분대장들과 소대본부를 빠져나와 마을로 향한다.
소대본부와 마을과는 좁은 바다 제방 둑으로 연결이 되어있어 평소에도 지나다니기에 불편하다. 우리들은 소대본부와 거리가 조금은 떨어진 동네 조그만 구멍가게에 모여 소주 한잔 마시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귀대하기로 했다. 오후엔 항상 훈련이나 보수작업 일정이 짜여있기 때문이다.
가게에 도착하자 누가 채근하지도 않았는데 기분 좋게 소주잔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목이 마를 때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마시고, 그렇지 않을 땐 목마를 것을 예상해서 술을 마신다하니, 나는 전날 밤새 목이 무척이나 말랐나, 아니면 닥쳐올 오늘 밤, 목마를 것을 예상했나. 짧은 시간에 상당량의 알코올이 혈중에 들어가니 군인 특유의 객기까지 나오려 한다.
그리곤 문득 얼마 전 이 마을 예비군 중대장이 소대원과 시비가 붙었다고 한 사건을 떠올린다. 이 동네에 살고 있을 터이니, 예비군 중대장 이 녀석 오늘 만나기만 해봐라. 그런데 마침 공교롭게도 가게를 지나가는 예비군 중대장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젊은이다. 순간 후다닥 가게를 튀어나가니 취중 생각을 알리 없는 동료들이 놀라 뒤따라 나온다.
허나 술 취한 사람의 의중을 간파 못하는 맹숭이가 어디 있겠나? 더구나 몰려나오는 군인들을 보고서 긴장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고, 달려드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예비군 중대장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쳐 버렸다.
아무리 현역이라 하더라도 술 취한 사람이 젊은 예비군 중대장을 쫓아가기는 역부족.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가 됐다. 허탈감이 겹쳐진 데다 점심시간이라는 기한에 쫓겨 정량을 넘어 소주를 쏟아 붓다보니 난 이미 인사불성이 돼 버린 상태가 되었다.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술 취한 내가 문제가 되었다. 전혀 몸을 가눌 길 없는 사람과 소대본부까지 오후 일정에 맞춰 동행하기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선임 분대장이 꾀를 내었다. 일단 소대본부에 연락을 해서 사병 몇몇을 차출하고, 마을에서 리어카를 임대, 인사불성이 된 나를 리어카에 눕히고 사병들이 운반하기로 하였다.
암울한 일제 시절, 대낮부터 성균관 뒷산에서 술을 마셔대던 변영로, 오상순, 염상섭 등은 소나기가 쏟아지자 발가벗은 채로 소등에 올라타고 종로로 내려와 길 가던 행인을 대경실색케 한다.
그 날 소대본부까지 오는 동안 부대원들은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또 리어카 통행하기도 힘든 좁은 바다 제방을 어떻게 넘어왔을까 생각만 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암울한 일제 시절, 문인들은 술 취해 벌거벗은 채로 소를 타고 종로거리를 활보하였지만, 난, 암울한 군 시절 군복 입은 채로 술에 떨어져 리어카에 몸을 싣고 소대본부로 돌아온다.
그러나 소대본부에 도착했다고 해서 일이 끝난 것이 아니다. 오후 일정에 맞추어 훈련이나 진지 보수를 실시하여야 하지만 마침 사단장이 헬기를 타고 소대본부로 직접 달려온다는 긴박한 통지가 왔다.
당황한 소대장은 분대장을 비롯한 부대원들을 집합시킬 수가 없었다. 분대장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거다. 육군 보병학교 출신인 소대장은 그럴듯한 꾀를 생각해 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사단장의 헬기가 도착하는 시간에 전부대원을 오전에 이어 오후에도 취침을 시켰다.
영문을 모르는 사단장은 전날 밤 야간경비에 혼신을 다한 부대원의 취침상태를 보고 흐뭇한 마음으로 소대장에게 치하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무릇 술 취한 사람에게는 술 취한 허물을 나중에라도 탓하지 말라. 이 날 소대장은 군인으로서 주인(酒人)정신을 훌륭하게 실행하였고, 영문을 모르는 사단장은 이를 널리 치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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