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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외국에도 홍상수가 있어?

'누가 나의 욕망을 훔쳐본다'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클로저>

05.02.11 18:59최종업데이트05.02.14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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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들간의 사각관계를 통해 일상에 숨겨진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 영화 <클로저>.
ⓒ 이카루스 프로덕션
설 연휴 마지막 날 종로 극장 앞은 관객들로 붐볐다. 명절이라 넉넉해진 주머니와 연휴동안 만나지 못한 연인, 친구들과 딱히 갈 곳이 없어 찾은 '즉석' 관객들과 나름대로 리뷰까지 챙겨가며 <클로저>를 만나러 온 관객들도 그 속에 있었으리라.

영화를 보러가기 며칠 전에 '성인영화보다 야하다'라는 리뷰를 본 적이 있어 이제 스무 살이 갓 넘은 후배와 동행하는 것이 조금 꺼려졌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서의 반응은 '별 게 다 야하네'였다. <클로저>는 인물들 간에 발생하는 성의 카테고리를 기본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맨 밑바닥의 본능을 이야기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클로저(Closer)', 단어를 보자면 '좀 더 가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인물들의 애정 관계를 '좀 더 가까이' 들여다봄으로써 인간이란 족속들이 도대체 뭔지에 대해 좀 더 가까이 알아보자는 감독의 의사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에는 신문사에서 부고란을 담당하는 기자 주드 로(댄 역)와 커피 서빙이나 스트립 댄서로 일하며 떠도는 나탈리 포트만(알리사 역), 금발이 매력적인 사진작가 줄리아 로버츠(안나 역), 피부과 의사지만 인터넷 채팅을 통한 성 욕구는 변태를 능가하는 클리브 오웬(래리 역)이 등장한다.

선남선녀인 이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사각관계가 펼쳐진다. '운명적인 만남'으로 연인이 되었던 댄과 알리사 사이에 안나와 래리가 등장하면서 파트너 바꾸기 게임이 시작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알리사 역을 맡은 나탈리 포트만이 단발머리와 길들여지지 않는 눈빛 등 신비주의를 동원해 두 남자를 우롱한다는 사실이다. 화이트칼라의 지적인 이미지를 풍기며 두 남자들에게 '모성'을 지닌 여성으로 비쳐지는 안나에 비해 그녀는 다듬어지지 않는 원석 그 자체다. 이런 그녀의 뜨거운 심장에는 오직 운명의 상대라고 믿는 댄에 대한 사랑밖에 없지만 댄은 결국 '사랑 그 자체에 열중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 마음속의 숨가쁜 애정을 숨김없이 표현하는 것은 무척이나 부럽다.
ⓒ 이카루스 프로덕션
결국 사진을 찍으면서 만난 안나와 댄은 서로에게 어쩔 수 없는 욕망을 느껴,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되고 래리는 극렬한 질투 속에서도 알리사에게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다.

남녀사이의 삼각관계, 심지어 사각관계까지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뻔할 뻔'이라는 소리를 들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클로저>는 '그 뻔할 뻔'을 지독한 냉소로 무마시켜버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자신과 사는 집에 애인을 끌어들여 바람을 피운 아내에게 '언제 어디서 어떤 자세로 했느냐'고 대놓고 물어보는 래리와, 이혼을 목적으로 전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한 새 연인 안나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댄은 겉으로는 쿨한 플레이보이지만 그야말로 속은 '쪼잔한 사내'에 다름 아니다.

그에 비해 안나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 미련 없이 경제력을 가진 전 남편 래리에게 돌아가는 것이나 알리사가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을 버리고 새 삶을 시작한 것은 '이 영화가 혹시 페미니즘 영화인가?'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 사랑에는 끝이 없겠지. 그리고 그 사랑에 끝없이 태어나는 욕망에도 끝은 없겠지.
ⓒ 이카루스 프로덕션
영화 <클로저>는 성인 남녀 사이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그러나 절대 표면 위로 떠오를 수 없는 성적 욕구와 타인에 대한 유혹, 생의 토막을 걸고 벌이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들을 은유적이고 때로는 노골적이기까지 한 대사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진실을 드러내거나 욕망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저 우리가 '불편한' 마음으로 이 영화를 봤다는 것 자체가 감독이 거둘 수 있는 가장 큰 성공이리라.

<클로저>를 보면서 이런 식의 ‘욕망 훔쳐보기’를 시도하는 국내의 홍상수 감독이 절로 떠올랐다. 모든 영화에서 우리 일상의 기저에 숨겨진 ‘구역질 날 정도로 리얼한 현실’, 그 자체를 필름에 담는 홍상수 감독처럼 마이크 니콜스 감독도 냉소적인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을 고발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아직 홍상수에 미치지 못했다. 감독은 어쩌면 영화 후반에 잠깐 ‘할리우드식의 친절’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햇볕이 작열하는 뉴욕을 걷는 알리사는 남성들의 욕망 어린 시선을 개의치 않으며 ‘나는 사랑 따위 없이도 쿨하게 잘 살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아 보는 동안 ‘허? 이런’하고 웃음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클로저>는 결코 야하지 않다. 그러나 어떻게든 욕망을 해결하고 끝을 보는 할리우드에서 이런 식의 시니컬을 무기로 갖춘 영화를 만났다는 것은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관객들은 부족하나마, 홍상수 영화를 한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느끼게 되는 '나의 일상을 고스란히 훔쳐 본 것에 대한' 불쾌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래서 나는 영화 <클로저>를 2% 부족한 '미국판 홍상수 영화'라고 정의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홍상수 감독의 영화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2005-02-11 21:02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홍상수 감독의 영화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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