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급한 마음으로 떠난 경주 남산길

이른 봄을 맛보고 온 산행길

등록 2005.03.03 23:33수정 2005.03.04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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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삼일절 이른 아침부터 전화통에 불이 났습니다. 대구 사는 큰 처형이 산행이나 하자며 집사람을 꼬드기고 있었습니다. 초겨울 십리 억새밭으로 유명한 창녕군립공원화왕산(드라마 <허준>의 촬영지로도 유명합니다)으로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야야, 뭐하노? 오늘 같은 날 집에만 있지 말고 산에나 가자” 그랬겠지요. “모리것다. 김 서방에게 물어 봐라”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했으니 말입니다. 건네주는 전화를 붙들고 반갑다, 아침부터 어쩐 일이냐 하면서 은근슬쩍 마음에도 없다는 듯이 “실없이 날도 추운데 가기는 어델 간다꼬...” 이렇게 퉁을 놓았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집사람 눈치(?)를 보니 집을 나서 어디든 훌쩍 떠나고 싶은 모양입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지요. “그랍시다. 그라모, 경주로 가입시더. 작은 처형도 데불고 전에 갔던 남산에나 한번 더 가는 게 좋을 거 같네예.”

이렇게 산행을 결정하고 집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건네주자 산행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의논하는 모양입니다. 경주 남산은 부산에서는 지척에 있는 산이기도 하려니와 오르면 오를수록 묘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또 문화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산이어서 자주 찾는 축에 듭니다.

남산은 신라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천년의 세월을 함께하며 그 영산으로 자리매김하여 왔습니다. 지금도 경주 사람 뿐만 아니라 외지의 사람들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경주 남산은 경북 경주시 인왕동을 비롯한 4개 동과 경주군 내남면 용장리 등 남북 8km, 동서 12km에 걸쳐있는 해발 494m의 산으로 '경주 남산 일원'이 1985년에 사적 제3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남산은 그 유명세에 힘입어 지금은 등산로가 사방에 걸쳐 나 있습니다.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부산에서 경주까지 약 1시간 정도가 소요됩니다. 예전에는 부산이나 경남 지역에서 경주로 향하는 길이 다양하지 못했던 관계로 얼추 2시간은 족히 걸렸었는데 1시간 정도이면 엄청 나아진 것입니다. 고속도로 옆의 지난해에 울울창창했던 키 큰 나무들이 눈곱만큼씩 또 다시 봄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그냥 발가벗은 그대로인데 먼발치에서 보면 점점 초록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a 한옥 양식의 경주 톨게이트

한옥 양식의 경주 톨게이트 ⓒ 김병기

집에서부터 많이 꾸물거린 탓에 경주에 도착한 때는 정오를 막 지나고 있었습니다. 톨게이트에서 들고나는 많은 차들로 약간의 시간을 더 지체한 후 작은 처형 댁으로 가 대구 큰 처형네와 합류하여 곧바로 길을 잡아 나섰습니다.

“어데로 갈랍니꺼?”
“통일전 뒷산을 탈라나?”
“고마 아무데로나 가입시더.”


결국은 ‘옥룡암’이라는 조그만 절이 있는 쪽을 택해서 산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날씨가 아직 풀리지 않아서인지 절에는 찾는 사람 하나 없이 그저 막막한 정적만 흐르고 절간 한쪽으로 따슨 햇살이 연방 내려앉고 있습니다.

a 옥룡암

옥룡암 ⓒ 김병기

올해는 봄이 늦다고 합니다. 이는 가는 겨울이 시샘을 해서가 아니라 지난해에 윤달이 끼어서 그렇다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수도 지나고 경칩이 나흘 후인데도 그 경칩이 음력으로 1월 25일입니다. 좌우지간 시냇물은 아직도 얼어 풀릴 기미가 없습니다만 뭐 며칠만 더 있으면 거짓말같이 풀리겠지요.


우리가 잡은 이 등산로에는 인적이 드뭅니다. 달랑 우리 가족 5명이 전부고, 우리들 이외에는 간간히 들리는 새소리와 물소리 정도입니다. 겨우내 깡깡 얼었던 땅이 풀려 제법 질컥거리는 쪽도 있고, 흙이 보드랍게 눈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시내도 건너고 잔가지가 쭈뼛쭈뻣 머리를 길 쪽으로 내민 좁은 길도 지나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에서 맛보는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산을 정복한 정복자만이 갖는 쾌감이 아니라 산 위에서 바라다 뵈는 먼 동리들의 아늑함과 그쪽으로 불어가는 신선한 바람, 그리고 한없이 맑아지는 정신세계, 바로 이런 것들의 쾌감입니다.

a 하얗게 얼음이 얼었습니다

하얗게 얼음이 얼었습니다 ⓒ 김병기

a 열심히 산을 오릅니다.

열심히 산을 오릅니다. ⓒ 김병기

간단하게 준비해 간 점심(없는 것 빼고 다 있는 진수성찬이었습니다)을 뚝딱 해치우고 기념 사진도 박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내려오는 길에 행여 도롱이(지율스님의 천성산 살리기 운동으로 잘 알려진 도롱뇽) 알이 있을까 해서 살며시 개울을 살핍니다.

지난해 낙엽이 개울 위를 덮고 있었는데 그곳을 살짝 들추어내니 아, 글쎄 그 밑에 턱하니 숨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알들도 조금만 더 있으면 봄과 더불어 새끼 도롱이로 거듭나겠지요. 자연은 이래서 좋은 것입니다. 물이 맑으니까 그런 생명들이 사는 것이지요. 우리도 자연의 일부분입니다.

“앞에 가는 놈은 도둑놈, 뒤에 가는 사람, 순경.”

다들 마흔이 넘은 세 자매가 쪼르륵 내려가다 갑자기 옛 생각이 났던지 이런 장난질을 하며 내려갑니다. 저 역시 오랜만에 듣는 말인지라 속으로 “어라, 이봐라”했습니다.

a 세 자매의 포즈

세 자매의 포즈 ⓒ 김병기

a 멀리 동리가 보이고...

멀리 동리가 보이고... ⓒ 김병기

a 도롱이(동그랗게 말려있는 게 도롱뇽 알입니다)

도롱이(동그랗게 말려있는 게 도롱뇽 알입니다) ⓒ 김병기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작은 처형이 “경주까지 와서 '경주 최부자집'은 둘러보고 가야 제맛이지”합니다. 중요민속자료 제 27호인 교동에 있는 경주최식가옥은 170여년 전의 이조시대의 건축으로 그 구조가 경상도 지방의 전형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 가옥은 1969년의 화재로 일부가 소실되고 문간채, 고방, 안채, 사당만이 남아 있습니다. 소실 전의 전체적 구조를 생각하면 가히 부잣집의 그 위용을 직감케 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최부자집’에는 흥미로운 가훈이 있으며 이 가훈을 지켜 후손들이 12대를 부자로 살았답니다.

a 경주최식가옥 전경

경주최식가옥 전경 ⓒ 김병기

a 이 겨울의 나목

이 겨울의 나목 ⓒ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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