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버스 안에서 만난 성자

우리는 가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삶을 배운다

검토 완료

김병기(stephanbk)등록 2005.03.28 14:58
대개 출근길 버스 안의 표정은 날이 흐려 우중충한 것처럼 짓눌려 있거나 따닥따닥 달라붙은 따개비처럼 좁은 공간에 몸을 비비며 가는 승객들이 토해내는 말없는 적막이 전부입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한 행동들을 창문 밖으로 표시해 보이거나, 잠시도 가만두지 못하는 시선들이 버스 안을 두리번거립니다.

가끔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낮은 목소리로 서로 몇 마디 웅얼거리다 이야깃거리가 다 떨어진 양 다시 머쓱한 자세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중 일부는 엠피쓰리로 음악을 듣기도 하고, 나머지 승객들 대부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 방송국의 뉴스 방송과 도착지를 알리는 안내방송을 경청하면서 자기들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조금은 피곤한 듯 아침부터 조는 사람도 더러 있고 신문을 본다거나 책을 읽는 사람도 간간이 있긴 합니다.

“날씨도 더운데 창문이나 열어놓고 가지.”

차가우리만치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어둔 분위기를 깨고 한 사내의 텁텁한 말이 터져 나온 것은 내가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을 채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습니다. 순간, 뭔 헛소리를 하는 작자가 여기 또 있고나 했습니다. 조용하기만 하던 버스 간이 한바탕 소동에 휩싸일 조짐을 보였습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약해도 너무 약해, 오늘 같이 이런 날씨가 뭐 추운 날씨라고 문을 꼭꼭 닫아걸고 가느냐 말이다.”

아무렇게나 말을 툭툭 던지는 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그리 크지도 않으면서 남들이 들으면 싫어할 욕지거리가 섞여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입을 열고는 혼자서 좌중을 휘어잡듯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얼마 정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혼자서 떠드는 것을 많이 보아온 터라 조금은 염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요즈음 것들은 옷을 예쁘게 입고 두툼하게 입기도 입지만 우리가 젊었을 때는 어디 이렇게 좋은 옷 없었어. 그래도 감기 한번 안 걸리고 살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툭 하면 감기야, 감기.”

그러고는

“사업도 안 하는 젊은 것들이 무슨 놈의 핸드폰 질은 핸드폰 질이야. 아무 때나 들었다 하면 삼십분도 좋고...”

이렇게 말을 이어가며 젊은이들을 싸잡아 나무란 뒤,

“우리 같이 못 배운 사람들은 마음에 안 찬다고 물건을 집어 들고 던져버리면 나쁜 사람이 되고, 국회의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자기의 의사와 부합된다 해서 온갖 것을 다 집어던져도 괜찮다면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나라의 땅을 팔아먹어야 꼭 나라를 파는 거냐. 기업들이 외국의 돈에 의존하는 것도 결국은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가 아니냐. 그리고 정치하는 사람들의 우매한 행동 하나하나가 또한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고 그들은 송충이 벌레 먹은 소나무와 똑 같은 거다. 그런 소나무는 벌레 먹은 부위만 잘라낼 게 아니라 뿌리 채 뽑아버려야 후한이 없다.”

뭐 대충 이런 정치적인 이야기, 사회문제에 관한 이야기 등등으로 혼자서 10여분 간의 열변을 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끝마다 교묘히 우리라는 표현을 씁니다.

모를 일입니다. 행여 나이 지긋하신 이 분이 토하는 열변이 얼토당토 않은 사족 같은 시끄러운 쪽이라든가 듣기가 싫도록 욕설이 많이 섞여 있다든가, 인신공격 쪽에 무게가 실렸다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리 못하도록 저지를 한다거나 버럭 화를 내었을 것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은 어디까지 인상을 찡그렸겠지요. 그러나 자신을 끝까지 낮추며 차근차근 말하는 데에는, 사리에 맞게 이것저것 털어놓는 데에는 그 누구도 관섭을 못하고 맙니다. 그렇다고 현실 감각에 맞추어보면 또 그리 맞지 않는 말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이 육십을 넘긴 사람이 쏟아내는 사설(私說) 앞에 일언반구도 못한 우리는 그 말들이 약간은 듣기가 거북살스럽기까지도 했겠습니다만(개인주의가 팽배한 나머지 자신의 일 이외에 타인의 일에는 잘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현상이 있으니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대체로 수긍을 하는 편인 것 같았습니다.

아니면 정신이상자가 하는 소리고 하니 그냥 웃어넘기듯 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그가 목적지에서 내린 다음 버스 안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좌중이라는 게 참 묘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 같이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들은 이런 말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돈 많이 가진 자들이나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이런 말 다 못해. 그들은 그저 몸 사리고, 숨기고, 그렇게 자기들 안위만 생각하거든...”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언뜻 내 뇌리를 스치는 반성의 물꼬는 이렇게 말을 토해내는 사람을 그저 내 이웃의 한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고 우리와 동떨어진 사회의 외계인과 같이 취급해버리는 의식이 아직도 내 가슴 속에 남아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설령 이 분의 정신상태가 약간의 문제가 된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병자로 치부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우리가 차라리 외계인일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은 새겨들을 수 있는 삶의 변별력을 우리 스스로는 키워나가야 될 것 같았습니다. 행여 그가 이 시대의 진정한 성자가 아니었을까요? 옛 성현이 말하기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두 사람은 자기의 스승이라 했습니다.

매일매일 버스라는 대중교통 편을 이용하여 출퇴근하는 가운데 오늘의 출근 때처럼 나를 돌아보고 반성케 한 날은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며, 나는 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명제를 가지게 한 소중한 아침 출근길이었습니다.
ⓒ 2007 OhmyNews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