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를 꺾다가

자연과 더불어 살아 가야할 환경에 소중함을 생각하며

검토 완료

박성훈(lord777p)등록 2005.05.13 20:24

야산에 올라온 고사리 ⓒ 박성훈


잔디 위에 곱게 피어난 재래종 하얀 민들레 ⓒ 박성훈

이 모든 것은 조물주께서 인간들에게 식물로 주신 것들인 만큼 자연과 더불어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에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해 마지않는다. 매우 각박한 도시생활에 매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할 사람도 있기는 하겠지만 요즈음 같이 교통이 편리한 세상에서 마음만 먹으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더구나 좋은 자동차시대가 되어 한 두시간만 질주하면 얼마든지 좋은 자연을 접할 수가 있으며, 또 주 5일제근무라는 시대적 상황에서 도시에 모여 직장생활 하는 이들은 주말이라도 복잡한 도회지를 벗어나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마움을 마음껏 느끼고 배우며 산다는 것은 사람들의 정서생활에 더 할 수 없이 유익한 일일 터이다.

사실 우리들의 아이일 적만 해도 농촌문화환경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라났기에 심성이나 정서가 그다지 각박하지는 않다고 여기고 있으나 요즈음 우리의 아이들은 도시생활에 집중하는 산업시대의 환경여건 속에서 인간의 심성이나 정서가 메마른 사막처럼 황폐하게 되어 황사가 날리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징후로서 보여지는 것이 거칠고 난폭해 진다든지, 인내심이 없고 조급해 진다든지, 불안해하고 우울해 한다든지, 생각이 옹졸하고 획일적이며 폐쇄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어떤 면에서는 위협적인 거대한 존재이이기도 하지만 또 그 반면에는 무한히 풍성하고 넉넉한 이익을 가져다 주는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은총인 것이다. 결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자연환경을 등지고는 살 수 없음이 분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자연을 함부로 파괴하는 것은 어떻게 라도 금해야하고 만부득이 개발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환경평가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진행하여 폭 넓은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얻어진 결과를 가지고 결코 졸속 없이 실행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조물주가 이 세상을 먼저 창조하신 후에 그 다음으로 인간을 맨 나중에 지으실 때에 먼저 지으신 피조물세계를 잘 다스릴 수 있는 관리자요 청지기 혹은 '지킴이'로서 맡겨주실 목적이었음은 매우 타당한 일이다. 심지어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라는 노동명령과 문화명령을 내리신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은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눈앞의 욕심에 급급하였고 오히려 환경질서를 무너트릴 생각만 해 왔던 것이 아니었던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인간의 자업자득(自業自得)이요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아니고 무엇인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조물주가 만드신 만고불멸(萬古不滅)의 진리이듯이 사람이 심은 그대로 거두는 것이리라. "산업사회 도시는 인간이 만들었고 농업사회 농촌은 신(神)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부패한 심성이 먼저 회복 받아야 자연이 또한 회복 될 것으로 이해해 본다.

지금 자연이 고통 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환경이 파괴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 만물이 탄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인간이 이 소리를 듣는가?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귀와 눈은 어두워지고 매우 무디어 둔감해 진 상태에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다. 그것은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 만족만을 위하는 이기주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드란 말인가?

고사리를 꺾으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아니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비웃을지도 모른다. 물론 평소에 그와 같은 것을 이미 생각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으로 고사리를 꺾으려 다닌다지만 나야 꺾어서 주고 싶은 방문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는 조금만 먹으면 된다. 나는 그것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나물들이 있으니까.

고사리는 꺾는 그 자체가 재미있다. 마음이 비워지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고사리가 잘 보이지 않다가도 어떤 때는 잘 보여진다. 어떤 때는 이미 지나온 길을 돌아서면 그제 서야 보이고, 어떤 때는 너무 가까워도 보이지 않다가 자기 손아래 있기도 하고, 자기 발 밑에 밟고 있기도 하다. 또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잘 보일 것 같지만 그보다도 자기의 자세를 구부리거나 낮추어 보면 더 잘 보인다. 조그만 풀잎에 가리워 졌기만 해도 보이지 않다가 마음을 차분히 하고 주위를 잘 살피면 숨어 있던 것도 발견하게 된다.

인생의 삶도 이와 같으리라. 정신이 없이 앞만 보고 달리는 것보다 가끔씩은 잠시 돌이켜 보고 여유를 가져보기도 해야 하는데, 높은 곳만 바라보고 낮은 곳은 보지 못한다든지, 멀리만 바라보고 가까운 곳은 보지 못한다든지, 또는 그 반대로 가까운 것만 보고, 먼 곳은 보지 못한다든지, 나만 보고 너는 보지 못한다든지 모두 문제인 것이다. 이따금씩 더러는 때를 침착하게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하고, 더러는 나의 환경만 보지말고 남의 환경도 살펴보는 여유나 너그러움이 참으로 필요하다.

이런 것은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만 가능한 일이지 않는가. 다른 동식물들에게는 과연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인격성이 아닐까 싶다. 그 인격성의 진실한 내면에는 조물주의 신비한 심성(心性)이나 신성(神性)의 비밀이 담겨져 있음이 분명하리라 생각해 보았다. 조국강토에서 자손만대 행복하게 살아 가야할 구도자들의 심정으로 말이다.(曉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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