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담임 선생을 가정 방문하다

등록 2005.06.07 15:05수정 2005.06.07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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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의 연휴. 서울에서 용인으로 출퇴근하면서 자율 학습 감독하랴, 야간 수업하랴, 학교 신문 만들랴, 정작 우리 아이들과 놀아줘 본 게 언제인지 몰랐는데, 오늘만큼은 마음 먹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날이다. 아내는 일찍부터 김밥을 싸고, 음료수를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오랜만에 나서는 가족 나들이로 두 딸이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낭랑하다.

휴일의 어린이대공원은 우리같은 사람들로 만원이다. 놀아주는 것도 이렇게 '날잡아서', '열심히' 해야 할 만큼 우리 나라 부모들은 바쁘다. 자유이용권을 끊고도, 줄을 길게 늘어서서 기다리다 보면 한나절이 후딱이다. 아이들을 아직도 신나는데 부모들의 표정을 쉽게 지쳐간다. 그나마 햇볕이 강하지 않아 다행이다.

한적한 벤치에 자리잡고 앉아 먹는 김밥의 맛은 일품이다. 김밥 몇 줄이 후딱 사라지고, 깨끗한 물 속을 헤엄치던 물개 이야기, 개코 원숭이 이야기, 오늘 따라 선 채로 졸고 있던 코끼리 이야기가 오후의 나무 그늘 아래 가득할 무렵, 아이들의 마음은 다시 놀이 공원에 가 있다.

오전보다 사람들이 배는 많아졌고, 햇살도 두 배쯤은 된다. 저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이 마땅치 않아도, 오늘만큼은 아이들 마음대로다. 롤러코스터나 바이킹을 타기에는 키도 모자라고 소리만 들어도 무서워하는 아이들은 회전 목마에도 신난다. 한참을 줄서야 하는 기다림도 아이들의 즐거움을 막지는 못한다.

그러다가 주머니 속 휴대폰이 울린다.

"선생님, 저 기억인데요. 서울에 와서요. 선생님 댁 찾아 뵐려구요."

요약하자면, 우리반 아이들 세 명이 미술 전람회 감상문 쓰는 수행평가 때문에 서울에 왔다가, 동대문 의류 상가 가서 옷 한 벌씩 사고, 서울 산다는 담임 선생님 생각나서 전화했다는 것이다. 반 아이들이 집에 찾아오는 것도 모처럼의 일이고, 오후의 놀이공원에도 지쳐갈 무렵이라, 자장면 사주기로 하고, 어찌어찌 찾아오라고 하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온다. 이거야말로 아이들이 학기 중에 담임 집에 가정방문하는 격이다.

집에 도착한 세 녀석들은 종일 돌아다녀서인지 땀을 빼짓이 흘리고 있다. "그래, 자장면 먹을래?"했더니, "냉면이요!"한다. 그래 그렇게 돌아다녔으면, 냉면이 제격이겠다 싶어, 집 근처 냉면 가게로 향한다. 실컷 먹으라는 생각으로 면까지 추가로 시켜 주문했는데, 이거야말로 '봄날의 게눈 감추기'다. 면을 더 추가해서 육수까지 닥닥 긁어 먹고야 허리를 펴며 잘 먹은 표정이다.


들어보니, 미술관은 입구까지 가서 팸플릿 하나씩 챙겨들고 나온 것이고, 점심은 햄버거 하나씩으로 해결한 것이고, 이렇게 머리 잘 써서(?) 그 유명하다는 의류 상가 옷 한 벌씩 챙겨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 휴일이면 가족들과 산책하던 백제 고분 솔숲 길을 제자들과 산책해 본다. 고등학교 1학년이 된 지도 3개월이 벌써 지났고, 그 치열했던 중간고사를 치러낸 이야기며, 그들에겐 사건이었음에 분명한 수학 여행의 추억들. 우리 가족들 이야기와 책 이야기. 선뜻 장인어른이라는 말까지 흘릴 줄 아는 대범함까지…. 아이들끼리 오랜만에 돌아다닌 서울 나들이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류장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친다. 나는 고등학교 때 왜 그렇게 담임 선생님이 어렵기만 했을까. 녀석들에게 오늘의 일이 학창 시절의 좋은 추억으로 기억될까. 그래도 이렇게 불쑥 찾아오는 아이들이라도 있다는 것이 선생 하는 행복이기도 한데….

다음날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조잘거리기 바쁘다. 그래도 마주치는 눈빛 한켠에는 우리만이 공유하는 무언가가 있다. 내가 나서서 아이들에게 다가가 주지 못했는데, 이만큼 가까지 다가와 준 아이들이 고맙다. 녀석들은 언제라도 선생님의 삶 속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것을 우리가 각종 규율과 권위와 통제로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는지도.

종례 시간의 교실. 이제 아이들은 다시 한 고비를 넘겼다. 아이들에겐 학원이며, 과외며, 자율학습이며 넘겨야 할 더 많은 시간들이 더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이면 이 아이들과 남은 하루를 함께 보내면서 삶의 부분들을 공유할 수 있을까. 어제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하루가 다시 지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용인시민신문> 교단일기 란에도 송부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을 <용인시민신문> 교단일기 란에도 송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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