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87

남한산성 - 핏빛 돼지

등록 2005.06.08 17:17수정 2005.06.0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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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삿기! 저만 살자고 도망을 쳐!”

장판수는 욕을 내뱉으며 정신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장판수의 왼편에 있는 윤계남은 아무 말 없이 눈에는 핏발이 선 채 이빨을 악다물며 역시 정신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도망가는 놈들은 쫓을 거 없다! 거세게 저항하는 저 놈들만 몰살시켜라!”

마부대의 명령에 청군은 두 겹 세 겹으로 천천히 포위망을 만들기 시작했다. 차예랑이 급히 홍명구에게 달려왔다.

“뒤편에 있는 적의 포위기 느슨하외다. 지금 몸을 피하시오서.”

홍명구는 차예랑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어차피 관군이 아닌 터! 여기서 몸을 피한 다 해도 욕될 거 없네. 어서 가게나!”
“하오나….”


홍명구가 아예 쳐다보지도 않자 차예랑은 슬며시 몸을 빼어내어 자신이 거느리고 온 의병들과 함께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포위망이 완전히 갖추어진 후에도 청병들은 조선군의 진지로 함부로 뛰어들지 않고 화살을 쏘며 조금씩 조선군을 압박해 나갔다. 이제 화약은커녕 화살마저도 떨어져 가는 조선군들이 오히려 직접 몸과 몸을 부딪쳐 싸우지 못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저 놈들이래 우리를 말려 죽이려고 하는구만! 이보라우 계남이!”


청군이 쏘는 화살에 사상자가 하나둘씩 늘어나자 장판수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윤계남을 불렀다.

“오랑캐놈들은 우리 스스로 진지를 허물고 뛰쳐나오길 바라고 있네! 놈들이 달려올 때까지 기다리게!”

윤계남은 장판수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눈치를 채고서는 미리 이를 자중시키려 했다. 하지만 장판수는 등나무 방패를 들고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나와 함께 앞으로 나갈 갈 용사는 이리 나오라우!”

30여명의 병사가 이리저리 나는 화살에 몸을 숙이며 장판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미 장판수의 용맹스러운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이 경외심을 품고 있던 자들이었다.

“모두 방패를 들라우!”

윤계남은 활을 놓고 장판수를 적극적으로 말렸다.

“이래서는 아니되네!”
“어차피 여기 있든 나가던 죽기는 매한가지네! 오랑캐 놈들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가갔서!”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네!”

윤계남과 장판수가 옥신각신 하는 사이 병사들이 급히 소리를 질렀다.

“오랑캐 놈들이 몰려나온다!”

활을 쏘아 조선군을 제압하던 청군이 드디어 전투를 완전히 끝낼 요량으로 전군에 돌격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거대한 파도와도 같이 밀려닥치는 청의 병사들을 조선병사들은 죽기 살기로 막아 싸웠다.

“죽지 말자우!”

장판수는 윤계남에게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질러대고선 적병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마구 찌르고 베어대었다. 윤계남 역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몰려오는 청병을 베어버렸다. 조선군의 진지가 무너지며 혼전이 벌어지자 중앙에서 활을 쏘며 독려하던 홍명구의 모습이 청나라 병사들의 시야에 드러났고, 그곳에 청군의 화살이 집중적으로 퍼부어졌다.

“윽!”

홍명구는 가슴과 배에 3대나 화살을 맞고서 비틀거렸지만 땅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갑옷으로 인해 한 번에 위중한 상처를 입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강한 정신력이 그를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당당히 활시위를 당기는 홍명구의 발 앞에는 가슴에 맞은 화살대를 타고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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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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