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 공포에 떨고있는 '난치성 환자들'

전문 시스템 없는 징병검사 체계... 의병제대도 힘들어

등록 2005.06.13 12:29수정 2005.06.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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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난치 진단 충격, 설상가상 입영통지

올해 스물 한 살인 우혁상(가명)군은 중학교 때부터 허리통증에 시달렸다. 가끔씩 물리치료를 받으며 버텼지만 고3이 되자 갑자기 통증이 심해졌다. 한의원에 가서 침도 맞아보고 병원 방사선과와 신경외과를 전전했지만 의사들은 우군의 증상을 집어내지 못했다. CT, MRI 등 각종 검사에서도 '이상 없음'통보를 받았다.

그러던 중 한 병원 재활의학과에서 정밀진단을 받은 우군은 의사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견을 들었다. '강직성척추염'. 류마티스 내과 희귀질환으로 현재 원인도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은 희귀난치성 질환이다. 우군의 증세처럼 통증이 계속 번지다가 심할 경우 뼈마디가 굳어져가고 경우에 따라 뼈가 대나무처럼 붙기도 하는 병이다. 완치는 불가능하며 처방도 염증수치만을 조절하는 정도.

하지만 충격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입영 통지서가 날아든 것이다. 증상이 외부로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한 강직성 척추염 환자들도 입대해야 하는 현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우군은 "그동안 군대 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는데 이젠 두렵다. 통증이 밀려오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데 일반 장병들과 똑같은 훈련과 병영생활을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우군은 오는 7월 7일 입대한다.

통증 부추기는 공포, 군입대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이 군입대 공포에 떨고 있다. 현행 징병신체검사 규칙이 이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희귀난치성 질환 중 우군이 앓고 있는 강직성 척추염을 비롯 구리대사 장애인 윌슨병, 헌팅톤병 등 일상생활에도 제약을 받는 희귀난치병이 입영 대상 항목으로 올라 있다.

침해성 손상 이후 극심한 통증을 수반하는 복합부위통증 증후군은 그 기준의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다. 서울대 의대 김용철 교수는 "이미 WHO에서는 만성통증을 장애로 인정할 것을 각국에 권고하고 있으며 이미 외국에서 통증은 제5의 바이탈 사인으로 여겨지고 있다"면서 "미국의사협회의 경우 통증환자 장애에 대해 의학적 모델 외의 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질환이 아직 면제 판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희귀성 내적 질환이라는 점과 이를 검사할 전문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은 징병검사 체계 때문이다. 현 신체검사규칙은 "각 질병의 중증도에 따라 현역 복무 여건을 고려해 현역 복무가 불가한 경우에 면제 판정한다"고 규정돼 있지만 이 규정은 희귀난치성 질환자들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객관적 확진'이 현실상 어려운 현실임에도 이에 대한 규정은 엄격하다는 것이다. 한국 희귀난치성 질환 연합회 신현민 회장은 "통증을 동반하는 희귀난치성 질환의 경우 일반 정형 검사로는 증상을 파악하기 힘들고 짧은 시간 안에 병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힘든데도 전문적인 진단 치료시설조차 없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들 질병에 대한 징병신체검사 시에도 별도의 전문적 검사 없이 일반 정형 검사만으로 판단한다.

"하루하루가 지옥", 의병제대도 어려워 발 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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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합부위통증 증후군(CRPS) 환자인 이용우씨의 촬영필름. 경추3,4번 사이에 척수자극기가 설치된 것이 뚜렷이 보인다. CRPS는 증상이 악화될 경우 이 기계를 장착해 신경을 자극해야 하는 정도의 심각한 통증질환이지만 현행 제도로는 군 입대를 피하기 힘들다. ⓒ 전관석

지난해 12월말 의병제대한 오승현(28)씨는 군대생활을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 오씨에게 복합부위통증 증후군이 찾아온 것은 지난해 초. 5분 대기조 출동을 하다가 다리를 심하게 삔 다음부터였다. 다리가 부어오르는 일반적 증상으로 봤으나 그 이상의 통증이 오씨를 괴롭혔다. 다행히 사단 군의관이 '복합부위통증 증후군'판정을 내리긴 했으나 의병제대까지는 무려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오씨는 "군대 내에 이 병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심지어 한 군의관한테는 꾀병 피우지 말라는 얘기까지 들었다"면서 "아픈 것은 싸워 이길 수 있지만 군대에서 인정조차 해주지 않는 게 서러웠다. 하루하루가 지옥이었고 목을 매려고 자리를 봐두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결국 치료시기를 놓친 오씨는 통증이 점점 번져갔고 의병제대를 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오씨는 최근에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통증완화 및 신경차단, 약물치료를 받고 매일 재활훈련을 하고 있지만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곤 외출이 힘든 상태다. 복합부위통증 증후군 환우회 이용우 회장은 "증후군을 비롯해 많은 희귀난치성 통증 질환에 대한 의병제대 기준이 굉장히 까다롭다. 군의관이 이에 대한 전문의식이 없을 경우엔 더욱 힘들어진다. 그러니 질환자들이 제대까지 꾹꾹 참는다"고 말했다.

법원 "희귀난치성 질환, 군 생활과 인과관계 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군 문제와 관련한 희귀난치병 환자들의 소송이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동안 법원에서도 이에 대해 관대한 처분을 내리지 않아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 의미 있는 판결 하나가 나왔다. 서울행정법원이 지난 8일 루푸스병 환자로 고생하다 의병제대한 박모씨가 서울지방보훈청장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한 것. "군 복무 중 겪게 된 극심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로 인해 유발되거나 자연적 경과 이상으로 현저히 악화됐다"는 판결이었다. 군 생활이 희귀난치병 질환자들의 상태를 급속히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의료전문 변호사인 서상수 변호사는 "이번 소송은 군대와 희귀난치성 질환의 인과관계를 법원이 최초로 인정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면서 "통증을 동반하는 희귀 난치병의 경우 군 생활 자체가 힘들다는 것이 입증된 만큼 이제라도 이들 질환에 대한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 그룹 참여해 질병 기준 새로 만들어야"

전문가들은 희귀난치성 질환을 일반 장애 정도로 규정해 놓은 현행 시스템을 전면 개편하지 않고는 이들의 고충을 덜어줄 수 없다고 말한다. 희귀난치병 환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져 일부 혜택을 받고 있긴 하지만 병역 문제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기 때문이다.

한국 희귀난치성질환 연합회 신 회장은 "희귀난치성 질환은 굉장히 정밀하게 검사하고 또 일정한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하는데 군대에서 오히려 병을 키우는 상황"이라면서 "병역법 특례제도 등을 도입해 통증질환에 대한 세밀한 분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학교 마취통증의학과 이철중 박사는 "조금만 빨리 왔다면 병의 확산을 막을 수 있었을 환자가 군대로 인해 치료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병원을 찾을 때가 가장 안타깝다"면서 "이들이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끔찍한 지를 알게 되면 이들에게 병영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징병검사 기준 과정에 각 분야 민간 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희귀난치성 질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나 이해가 어려운 현실이기 때문에 전문가 그룹이 적극적으로 참여, 질환에 대한 정확한 증상과 그에 따른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병무청은 8월 발표예정으로 징병신체검사규칙 개정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이 연구 내용에는 희귀 난치성 질환의 범위 및 정의, 현황을 비롯해 진단기준 및 치료기간 예후, 질환 확인 방안 등 그동안 희귀난치성 질환자들과 전문가들이 개선을 지적해 온 항목이 포함돼 있어 그 결과가 주목된다. 국방부 관계자는 "징병신체검사 규칙 내용의 타당성 여부와 질환자들의 현실을 감안해 규칙 개정시 이를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희귀난치성 질환, 이슈화되나

샴쌍둥이 분리 수술 등의 세계적 사건으로 희귀 난치성 질환자들의 현실이 많이 알려졌지만 우리나라의 사회적 이해도는 그리 높지 않다. 물론 일부 질환에 대해서는 의료비가 지원되고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에 대한 선택적 혜택도 이뤄지고 있지만 꾸준한 재활·신경치료를 받아야 하고 평생 약을 먹으며 통증을 눌러야 하는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점점 가중되고 있는 현실이다. 여기에 병역 문제도 큰 걸림돌이다.

그동안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던 질환자들을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올해 안에 관련법의 윤곽이 드러날 가능성도 높다. 우선 국회의원들이 앞장서고 있다.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실은 강직성척추염 환자들의 청원을 소개해 국회 내부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데 단초 역할을 했다.

희귀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관련법 제정 문제는 한나라당 안명옥 의원실이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안 의원실 정병익 비서관은 "관련 법안이 없는 현재 상태로는 세부 장애 기준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다"면서 "현재 관련법안을 다듬고 있으며 늦어도 올해 안에 관련법안을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희귀난치병 질환과 군 생활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한 판결이 나온 만큼 유사한 소송에도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서로 종합법률사무소 이강일 실장은 "그동안 군생활로 인한 질환 상태악화를 인정하지 않아 왔는데 이번 판결로 인해 이들의 군 입대는 무리라는 것이 입증됐다"면서 "유사한 소송에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 난치성 환자들의 현실이 많이 알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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