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할아부지가 잡으신 오징언데요"

아이가 가져다 준 '오징어'를 보니 옛날이 떠오릅니다

등록 2005.07.01 11:01수정 2005.07.01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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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원래 오징어를 싫어합니다. 특히 말린 오징어는 더욱. 맥주 안주로 '딱'이지 않느냐고? 말씀도 마십시오. 무슨 발 냄새도 아니고 시큼함과 고루함의 어정쩡하면서도 오래 퍼지는 그 냄새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니까요.


아시는군요. 그래요, 제가 어릴 적에 오징어 구경을 못해봐서 그렇습니다. 씹으면 씹을수록 담백해지는 그 맛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일단 살짝 구워 껍질만 벗기면 보들보들하고 쫀득한 그 질감 또한 못 접해봐서 그렇습니다. 어릴 적에 제가 먹어본 해산물은 바싹 마른 미역과 짜디짠 새우젓, 자반고등어 대가리가 전부였습니다.

어머니가 사 오시는 고등어는 모내기 날엔 제대로 몸통이 붙어 있었지만 평소엔 주로 지푸라기에 꿰어 달랑달랑거리는 고등어 대가리 여남은 개가 다 였습니다. 어머닌 이걸 댓돌 위 마루 기둥에 걸어 놓곤 하셨습니다.

빨간 화롯불에 비린내를 내뿜으며 지글지글 익어가던 고등어 대가리. 살이라야 등뼈와 이어지는 잔등의 어린 아이 콧구멍만큼 패인 곳에서 나오는 반 숟가락 정도밖에 안 됩니다. 하지만 아가미와 주둥이가 바삭하게 익었을 때 씹어 먹으면 살도 아닌 것이 짭짤하고 비릿하면서도 달콤합니다. 그렇게 맛 볼 새도 없이 없어지는 고기 살점을 가난의 맛인가 보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땟국에 늘 절어 있는 내 누리끼리한 러닝셔츠 냄새랑 가끔 혼동이 되기도 했던, 그렇게라도 연명하는 것이 그래도 행복이었다던 그 시절.

"울 할아부지가 잡으신 오징언데요, 잡숴 보시래요."


한 아이가 까만 봉지에 오징어를 담아 왔습니다. 확 올라오는 소금기. 크기도 해라. 형편이 어려워 보이나 의지가 굳어 전교 1, 2등을 다투는 그 아이에게 샘플로 온 교사용 문제집 하나를 준 것이 아이의 할아버지에겐 부담이어서 이걸 보내셨나 봅니다.

밤새 바다에 나갔다 와서 오전 내내 주무신다기에 퇴근 무렵 인사도 드릴 겸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아이가 살고 있는 바닷가로 갑니다. 자전거 페달에 미역냄새 가득 머금은 바람이 와서 걸립니다.


대낮같이 불을 밝혀 놓고 수리를 하는 오징어 배들과 그물 손질하는 사람들을 지나 방파제 끝에 달린 작은 횟집에 도착했습니다. 아이가 할아버지를 부르니 횟집 뒤에서 할아버지가 나오십니다. 젊어 보이셨습니다. 손 인사를 나누고 몇 가지 의례적 대화를 나눴습니다.

"아이구, 이거 명색이 오징엇배 타는 집에 오셨으니 오징어 썰어서 소주 한잔 받아 디리야 되는디… 어쩌나…."
"좋지요. 이래봬도 술 좀 먹습니다."

할아버지와 저, 둘만의 제법 유쾌한 술자리가 시작될 무렵 해는 태백산맥을 막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잘 나갈 땐 불배(오징어 배)도 부리고 그랬는데. 하유, 그땐 돈을 자루에 짊어지고 댕겼으니까요, 뭐."

술김일까. 담배를 피워 문 할아버지 고개가 숙여집니다. 왜 이런 분들의 삶에 너울거리는 긴 질곡은 꼭 끝이 이리 허름한 모양이어야 하는지.

"돈 벌어 여기저기 다 퍼줬지. 지금은 저 시장 골목이나 들어가야 유흥가가 있지만 그땐 예쁜 색시들은 여기 다 있어서 아주 흥청거렸거든."

바다로, 대처로 나다니는 동안 정신이 병들고 밖으로만 나돌던 아들이 어느 날 손주라고 데리고 들어 온 게 저 아이라는 겁니다. 다행히 할머니가 바지런하셔서 집도 사고 요즘 엄마들처럼 반들반들하게 아이도 잘 키우고 있었습니다.

"저 놈은 지 할애비랑 딴 판이 되놔서 아주 여물어요. 즈이 에미가 기르면 지금 보다 재미가 클 텐데… 모쪼록 잘 부탁 디립니다."

할아버지는 또 배를 타러 나가고. 아이는 방파제에 다리를 대롱대롱 늘어뜨리고 앉아 낚시를 하고 있습니다.

"정석아, 그러다 고래가 물어가요. 뒤로 더 와서 해야지."
"저 낚시 디게 잘하는데요? 숭어도 훌치고 그래요."

그래, 아마도 너를 기르는 것이 바다인지도 모르겠다. 저 멈추지 않는 파도가, 저 끝없이 밖으로 뭔가를 밀어내는 백사장이….

어둑해지면 배들이 바다를 향해 달립니다. 한 두 시간 후 저 수평선에는 일제히 불을 밝힌 불배(오징어 배)들이 황금을 낚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불빛이 밝아서 그 불빛에 살이 까맣게 탄다지… 오징어 값이 좀 오르려나.

덧붙이는 글 | *전 시골 초등학교 선생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덧붙이는 글 *전 시골 초등학교 선생입니다. 아이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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