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 난생 처음 친구들과 도시에 가다

잃어버린 지갑 찾겠다고 내내 뜀박질만 한 아이들

등록 2005.07.18 09:13수정 2005.07.1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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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4학년, 11세. 우리 집 큰 아이, 인효 녀석이 난생 처음으로 부모의 도움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도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자신도 이제 10대라며 우쭐대던 녀석이었지만 동생 인상이보다 겁이 많은 녀석입니다.


인상이 녀석은 혼자서 산에 오르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재래식 화장실을 끄떡없이 잘 다니는데 인효 녀석은 도시의 아이들처럼 이것저것 꺼리는 게 많습니다. 새끼 낳은 개집에 들어가 잠을 잤을 정도로 인상이 녀석이 완전 생짜배기 촌놈이라면 인효 녀석은 어딘가 모르게 촌놈 같지 않은 '도시형 촌놈'입니다.

"아,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내일이 얼른 왔으믄 좋겠다."

도시여행 앞두고 들뜬 큰아이

하지만 녀석은 역시 어쩔 수 없는 촌놈은 촌놈이었습니다. 도시 나들이 가겠다던 전날부터 내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소풍가는 전날보다 몇 배는 더 들떠 있었습니다.

"너 여자 애들하고 같이 가니까 좋냐?"
"에, 아니거든."
"그래도 좋지?"
"에이 몰라, 지들이 따라온다고 해서 그냥 같이 가는 거지 뭐."
"그래도 조~오찮아 인마."


"아, 왜 이렇게 시간이 안 가지."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그러냐?"
"응, 두근두근 거려."
"여자애들 때문이지?"
"에, 무슨. 아니거든."
"아빠는 네가 부러워 죽겠다."

나는 녀석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신나게 골려 먹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자애들 얘기만 나오면 버럭 화를 내며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던 녀석이었는데 이번에는 말끝을 흐리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여자애들도 함께 가게 된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같은 반 종필이 하고 단 둘이서 공주 시내로 놀러 간다고 하니까. 같은 반(4학년 한 반, 20명이 전부지만) 연아 하고 인효 짝꿍인 수진이 같이 가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자애들과 함께 도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촌놈들에겐 꿈도 못 꿨던 대사건이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녀석들은 대수롭지 않은 모양입니다. 녀석들에게 있어서 대사건은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이 함께 시내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난생처럼 부모의 손길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도시에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a 작년 봄, 인효 생일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연아 가운데 삐쭉 솟은 놈이 종필이. 하얗게 치아 내놓고 웃는 놈이 인효.

작년 봄, 인효 생일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연아 가운데 삐쭉 솟은 놈이 종필이. 하얗게 치아 내놓고 웃는 놈이 인효. ⓒ 송성영


지갑 잃어버린 연아

드디어 녀석의 화려한 도시 외출을 하는 날, 토요일 아침. 인효 녀석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에 갔습니다. 녀석의 두 달 용돈에 해당하는 돈 만원까지 챙겨 학교에 가면서도 내내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눈빛은 호기심과 약간의 두려움 그리고 그 어떤 신비로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아비 된 나는 낯선 곳으로 떠날 채비를 갖추고 있는 녀석이 그 신비로운 눈빛으로 내내 세상을 살아갔으면 싶었습니다. 낯선 세계로 향하는 그 순수한 마음자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녀석의 그 두근거리는 마음자리를 따라가고 싶었습니다.

처음으로 부모의 품에서 벗어난 녀석은 지금 어떤 낯선 세계를 경험하고 있을까? 처음으로 자식을 홀로 떠나보낸 아비 된 나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토요일 내내 녀석이 낯선 세계로 떠나기 전에 품었던 그 두근거리는 마음자리로 녀석을 기다렸습니다.

오늘은 늦게 들어올 것 같다고 짐짓 어른스럽게 말했던 녀석이 오후 3시쯤에 돌아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 왔습니다. 녀석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습니다. 잔뜩 흥분해 있었습니다. 재미있게 놀다왔냐고 묻기도 전에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연아 지갑 잃어버렸어!"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고 공주 시내 한복판에서 내렸는데 책가방에 넣어 두었던 연아의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연아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모양입니다.

혹시 버스에 지갑을 놓고 내리지 않았나 싶어 연아는 엉엉 울면서 버스 종점까지 내리 달렸다고 합니다.

"니들은?"
"우리도 그냥 연아 따라서 달렸지, 어이구, 뛰다가 사람들하고 부딪히고 힘들어 죽을 뻔 했어."

연아는 인효보다 만원 더 많은 2만원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촌놈들에게 2만원은 분명 큰 돈이었습니다. 적어도 우리 집 인효 녀석을 기준으로 보자면 석 달 용돈에 맞먹는 거금이었습니다. 얼마나 애석했겠습니까. 전날 밤부터 꿈에 부풀어 그 누구의 간섭 없이 이것저것 군것질도 하고 사고 싶은 걸 신나게 사겠다고 작정했을 것이었는데 단 한 푼도 써 보지도 못하고 지갑 채 잃어버렸으니 말입니다.

지갑 찾아 공주 바닥을 뛰어다니다

그렇게 녀석들은 공주시내 한복판을 뛰고 또 뛰었다고 합니다. 한 녀석은 앞장서서 울며불며 뛰어가고 세 녀석은 무조건 뒤쫓아 뛰었을 것입니다. 앞장서서 뛰는 녀석은 지갑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힘든 줄 모르고 줄창나게 뛰었을 것이지만 뒤따라 뛰는 녀석들은 연아처럼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지갑을 잔뜩 움켜쥔 채 뛰었을 것입니다. 힘들면 잠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고 저만치 앞서 뛰는 연아를 놓칠까봐 손에 쥔 지갑을 재차 확인하고 다시 죽어라 뛰었을 것입니다.

"수진은 뭐가 좋은지 계속 웃고, 또 연아를 크게 소리쳐 부르더라구, 거리에서 창피하게 말여."
"왜 불렀는디?"
"천천히 가자구, 어휴,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수진은 연아 뒤를 쫒아가며 비실비실 웃더랍니다. 그 뒤를 쫒던 종필이와 인효는 뭐가 좋아서 웃냐며 버럭버럭 화를 냈답니다.

아이들이 버스에서 내린 장소하고 버스 종점까지는 장장 1km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녀석들은 숨 가쁘게 버스 종점에 도착해 함께 버스를 타고 왔던 5학년짜리 형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 형 말로는 연아의 지갑은 검정바지에 흰 티를 입고 흰 모자를 쓴 대학생쯤 돼보이 어떤 형이 가져갔을 것이라고 했답니다. 버스를 타고 올 때 연아는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어떤 형이 연아의 바로 뒤 좌석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지요.

"가방 옆 주머니에 지갑을 놨다는디, 그걸 열고 가져 갔나벼, 연아가 그러는데 지갑 놨던 곳이 열려 있었데, 또 버스 안에 사람덜이 엄청 많았거든."

뜀박질로 지칠 대로 지친 녀석들은 5학년짜리 형 말에 따라 또다시 공주 시내 곳곳을 뛰어 다녔다고 합니다. 돈키호테처럼 겁도 없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그 어떤 형을 찾겠다고 공주 바닥 여기저기를 끼웃거리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뜀박질 하면서 점심은 먹기나 했냐?"
"컵라면하고 아이스크림 사먹었어."
"어디서?"
"맨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근처 슈퍼에서."
"어이그 순진한 촌놈들, 거기까지 다시 돌아가서 사 먹어? 연아는?"
"우리가 사줬지"

하지만 연아는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아 컵라면조차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컵라면이 다 불어 터져서 쓰레기통에 버렸어, 아까워 죽겠어"
"야 인마, 넌 친구보다 컵라면이 더 중요하냐?"
"에이, 그래두 아깝잖아."

영화 한 편 찍은 아이들

인효 녀석 생일 때 우리 집에 놀러 와 내가 만들어준 버들피리를 빽빽 불어대던 새침때기 연아, 동생에게 가져다주겠노라며 버들피리를 하나 더 만들어 달라던 예쁜 연아는 내내 화가 풀리지 않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어떤 아줌마에게서 핸드폰을 빌려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합니다. 엉엉 울면서 말입니다.

연아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하지만 나는 인효 녀석에게서 금방 일어난 생생한 얘기를 들어가며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우리 집 인효 녀석만큼이나 눈이 큰 아이, 두 눈이 댕그란 연아. 연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 또한 수진처럼 킥킥 웃음을 참아가며 뒤따라가고 싶었습니다. 나는 귀찮아하는 인효 녀석에게 자꾸만 묻고 또 물었습니다.

"어떻게 울데? 큰소리로 막 울었어? 엉엉 울면서 막 뛰어가데?"
"에이 몰라."
"뛰어갈 때 뭔 생각이 나데? 니들 디게 재밌었겠다. 잉."
"어이구 재미는 무슨, 다시는 공주 시내에 안나갈 꺼여"
"다시는 안가나 보자 인마, 아빠도 따라갈 껄, 따라가서 울고 있는 연아 달래줄 껄."

돈보다 주민등록번호가 걱정?

복더위에 왕복 2km가 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뛰다가 볼일 다 본 촌놈들의 첫 도시 나들이, 녀석들은 평생 잊지 못할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 편의 영화를 찍고 왔던 것입니다. 녀석들은 다 커서 오늘의 힘들었던 여정을 기분 좋게 떠올릴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녀석들이 견딜 수 없이 부러웠습니다.

이쯤에서 원고를 끝내려 했는데 '촌놈, 난생처럼 친구들과 도시에 가다' 영화는 계속되었습니다. 녀석들의 영화가 여기서 끝나면 뭔가 싱겁지 않습니까?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신나게 놀지도 못하고 땀띠나게 뜀박질만 했다고 불만이었던 인효 녀석이 내심 연아가 걱정 됐는지 전화를 걸어볼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통통 튀는 목소리, 연아였습니다. 지갑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 지갑은 버스 안에서 잃어버린 게 아니고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떨어뜨렸던 것입니다. 학교 앞 정거장에서 공주시내로 떠난 녀석들 바로 뒤차를 탔던 같은 반 친구 영웅이 주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연아 것인지 알았냐구요? 지갑에는 연아의 사진이 붙어 있는 적십자사에서 발행한 수료증이 있었다고 합니다. 인효 엄마가 전화를 받았는데 연아가 그러더랍니다.

"거기에 주민등록번호가 적혀 있어서 큰 일 날 뻔 했어요"

돈도 돈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할까봐 그것이 걱정이었나 봅니다. 열 한 살짜리 주민등록번호를 누가 도용하겠습니까? 순진한 촌놈은 촌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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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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