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삔위는 왜 '살인자'가 되었나

[해외리포트] "농민공 사형수, 죽이지 말라".. 들끓는 중국여론

등록 2005.09.18 05:50수정 2005.09.18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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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형수를 둘러싸고 중국 여론이 들끓고 있다. 사람 넷을 죽인 왕삔위(王斌余)라는 살인범에 대해 중국 법원이 사형을 선고하자, 주요 언론매체를 비롯해 인터넷 등에서 격렬한 논쟁이 붙었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그에게 사형선고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과, 동정은 하지만 법은 냉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지난 9월 4일 중국 관영신문 <신화사>의 인터넷판 <신화왕>에 첫 보도가 나간 직후다. 기사제목은 "사형수 왕삔위의 말".

주인공 왕삔위는 올해 27살의 농민공(돈벌기 위해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 농민 노동자)으로 지난 5월, 사람 넷을 죽인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려 네 사람이나 죽인 잔인한 살인범을 두고 왜 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한다'고 동정하는 것일까.

농민공 왕삔위는 왜 '살인자'가 되었나

a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노동자·농민 등은 점차 사회 하층계급으로 전락하고 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노동자·농민 등은 점차 사회 하층계급으로 전락하고 있다. ⓒ 박현숙

"저는 깐쑤성의 한 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6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세 식구가 한 방에서 웅크려 잠을 잤습니다. 어릴 때 집이 가난한 탓에 학교를 다니면서 농사일도 같이 해야했고 밥 짓는 일, 동생을 돌보는 일도 제 몫이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줄곧 집에서 일을 했어요.

집에 있는 동안 나는 내가 우리 안에 갇힌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했고 항상 밖으로 뛰쳐나가고만 싶었습니다. 그 뒤 집을 나와 일을 하게 된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였고 내 운명을 바꾸고 싶어서였죠. 나 자신을 위해 더 많이 분투하고 싶었어요.

마을의 아는 사람 소개를 통해 17살 때 깐쑤성으로 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다시 란저우, 닝샤, 인촨 등지로 와서 건설현장 인부로 일했고 삼륜차(인력거)를 몰기도 했죠. 막 건설현장 인부로 일을 할 때 하루 노임이 11.5위안(한화 약 1500원)이었고 거기서 밥값을 제외하면 남은 돈은 7.5위안(한화 약 1000원)이었어요.


그 후 14살짜리 동생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같이 일을 했는데 걔는 하루에 5위안(한화 약650원)을 벌었어요. 우리가 먹은 것은 감자와 배추가 들어간 면이었어요. 무조건 싼 음식만을 사 먹었지요. 잠은 나무판자로 만든 큰 침대에서 몇 십 명이 비좁게 잤습니다."


지난 9월 4일 <신화왕>에 실린 기사의 일부 내용이다. 기사는 '우리 안에 갇힌 고양이' 신세를 벗어나 돈을 벌고 운명을 바꾸고 싶었던 가난한 산촌 소년 왕삔위가 결국 사형수로 '운명이 바뀐' 기구한 사연을 그리고 있다.


2005년 봄, 깐쑤성 닝샤의 한 건설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왕삔위는 고향에 있는 아버지로부터 급하게 치료비가 필요하다는 연락을 받는다. 왕삔위가 17살 때부터 10년 동안 도시에서 농민공 생활을 하며 힘겹게 번 돈 3만 위안(한화 약 4백만 원)으로 지난해부터 고향에서 새 벽돌집을 짓던 아버지가 다리에 상처를 입어 급히 치료가 필요하다는 것.

수중에 한 푼의 돈도 없었던 왕삔위는 밀린 노임 5천위안(한화 약 65만원)을 받고자 사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사장이 준 돈은 고작 50위안(한화 약 6천5백 원)이다. 화가 난 왕삔위는 현지 노동부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노동부에서는 법원에 가보라고 했다. 법원을 찾아간 왕삔위에게 돌아온 대답은 안건 접수에만 3~6개월이 걸리니 다시 노동부를 찾아가 보라는 것. 할 수 없이 또 노동부를 찾아간 그는 다행히 노동부 중재로 노무공급 청부업자로부터 5일내 노임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하지만 노동부를 나온 뒤 청부업자는 태도를 싹 바꿔 그에게 노임지불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왕삔위와 그 동생에게 당장 일터를 떠나라고 명령했다. 오갈 데가 없어진 두 형제는 그날 밤 청부업자 집으로 가 생활비와 밀린 노임지불을 요구했다. 집안에 숨어 나오지 않던 청부업자는 근처에 사는 다른 농민공이자 현장책임자를 불러 그들을 몰아내라고 했다.

아내와 장인 등을 대동하고 나온 책임자가 왕삔위에게 "개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며 발길질을 해대자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왕삔위는 휴대하고 있던 칼을 꺼내 그들을 찌르고 만다. 그가 휘두른 칼에 네 명이 죽고 한명이 중상을 입었다. 사건 발생 직후 왕삔위는 곧바로 경찰서로 가 자수했다.

들끓는 동정여론 "왕삔위를 사형시키지 말라"

a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이후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이라는 새로운 국정이념이 제시되었다.

후진타오 체제의 등장이후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이라는 새로운 국정이념이 제시되었다. ⓒ 박현숙

2005년 5월 11일에 일어난 왕삔위의 살인사건은 알려지지 않다가 9월 4일 신화사가 첫 보도를 내보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중국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각 신문 기고란 등에는 왕삔위를 동정하는 글이 매일 올라왔고 법학자 등 지식인들도 기고를 통해 그에게 내려진 사형선고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왕삔위를 동정하는 대다수 여론은 그가 살인을 한 것은 비록 처벌받아 마땅한 행위지만, 그를 살인자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주변환경, 다시 말해 왕삔위와 같은 사회최하층 계급이 처한 중국사회의 열악한 '제도적 환경'이 먼저 고려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학자 스용은 베이징 일간지 <신징빠오> 기고를 통해 그에게 사형을 선고한 '법'의 도덕성을 비판했다.

"법은 왕삔위가 처한 환경을 고려하지 않았다. 법이 이러한 도덕적 기초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금 '법의 정의'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왕삔위가 정말로 법을 필요로 할 때 법은 '부재중'이었다."

법학자 까오이페이도 "왕삔위에게 사형을 선고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글에서 법이 그에게 극형을 선고한 것은 인성에 위배되는 행위라고 주장했다. 인터넷에서도 왕삔위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자신을 평범한 중국공민이라고 밝힌 한 시민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최고 인민법원, 최고 검찰원에 보내는 공개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서한에서 "공산당 통치하 형장에서 농민공 왕삔위를 총살해서는 안된다"며 "법률은 공정,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왕삔위가 오랫동안 이익침해를 받는 동안 법률은 왕삔위를 법적으로 보호한 적이 있는가? 그는 한번도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누린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사회에 속출하는 제2, 제3의 '왕삔위들'

a 최근 중국에서는 농민공들 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농민공들의 저녁식사 모습.

최근 중국에서는 농민공들 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농민공들의 저녁식사 모습. ⓒ 박현숙

중국 사회 곳곳에는 비슷한 환경에 놓인 또 다른 '왕삔위들'이 제2, 제3의 왕삔위가 될 운명에 처해 있다.

왕삔위가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인 지난 7월초, 광뚱성에서는 아싱(阿星)이라는 청년이 왕삔위와 비슷한 이유로 살인을 저질러 크게 사회 문제화된 바 있다. 이른바 '아싱 현상'으로 보도된 그의 사건은 훨씬 뒤늦게 알려진 왕삔위 사건과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의 동정을 불러일으켰다.

15살 때부터 도시로 나와 농민공 생활을 하던 올해 20살 청년 아싱은 왕삔위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어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 싶었지만, 결국 밀린 임금문제와 인간적 모멸감이 화근이 되어 순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당시 아싱 사건이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또 다른 이유는 그의 고향 동료들이 만든 '칸셔우당(砍手党, 손을 자르는 범죄조직)'이라는 범죄조직이 보도되면서다. 이 조직은 아싱의 고향 농촌 청년들이 만든 범죄집단으로 주로 광뚱과 션전 등지에서 사람들의 손을 자르는 강도짓을 하며 사회치안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싱은 그들과 가까이 지내면서도 범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 결국 어이없는 살인을 저질러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당시 아싱사건이 중국사회에 던진 교훈은 단순히 아싱의 우발적 살인에 대한 동정이 아니다. '칸셔우당'으로 상징되는 사회하층계급들의 (사회에 대한) 보복심리가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것과, 살인을 낳을 수밖에 없는 중국사회 내부모순이 점차 폭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왕삔위와 아싱을 살인자로 만든 것은 바로 사회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등과 불공정, 강자만을 위한 사회라는 중국사회의 제도적 토양이라는 사실이다.

'조화로운 사회건설', 인민 내부의 모순해결이 관건

지난해 9월 개최된 공산당 제16기 4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는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후진타오 체제의 새로운 국정이념이 제시된 바 있다. 국가주석 후진타오는 "우리가 건설하려고 하는 조화로운 사회는 민주법치와 공평·정의, 신뢰와 우호, 활력이 넘치고 안정과 질서가 있으며, 사람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라고 개념 정의를 했다.

'조화로운 사회건설'이라는 새로운 국정이념이 나온 배경은 개혁개방 이후 세계 최대로 벌어진 빈부격차와 이로 인한 사회 불안정 요인의 증가다. 최근 들어 중국 전역에서 발생하고 있는 각종 시위 사태와 왕삔위, 아싱과 같은 사회최하층 계급의 범죄율 증가, 부유층에 대한 증오와 보복심리 확산은 '조화로운 사회건설'을 위협하고 있는 최대 모순으로 떠오르고 있다.

때문에 현재 중국 공산당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숙제는 사회주의 조화사회 건설을 위한 '인민내부의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사형수 왕삔위는 마지막으로 '소원'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내 소원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겁니다. 주변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가져서 우리 농민공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회가 부디 우리 농민공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랄 뿐이죠."

a 중국 인터넷 포털 신랑왕에 실린 왕삔위 사건 관련 기사들. "민공이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4명을 죽였다"는 타이틀 아래 왕삔위의 아버지 얼굴이 보인다.

중국 인터넷 포털 신랑왕에 실린 왕삔위 사건 관련 기사들. "민공이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4명을 죽였다"는 타이틀 아래 왕삔위의 아버지 얼굴이 보인다. ⓒ 신랑왕


" 소원은 아버지가 조금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것"
<신화왕> 9월 4일자에 보도된 사형수 왕삔위의 말

"저는 깐쑤성의 한 산촌에서 태어났습니다. 해마다 가뭄이 잦아서 집안의 농사 수확량이 좋지 않았어요. 6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가정생활은 어려워서 세 식구가 한 방에서 웅크려 잠을 잤습니다. 요 몇 년 간 일을 해서 번 돈으로 그제야 흙집 옆에 방 몇 칸짜리 벽돌집을 지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돈이 부족해서 창문은 아직 완성을 하지 못했습니다.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학교를 다니면서 농사일도 같이 해야 했고 밥을 짓는 일, 동생을 돌보는 일도 제 몫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는 줄곧 집에서 일을 했어요. 동생만은 공부를 시키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나도 글을 모르지만 잘 살고 있다, 더군다나 집안에 돈이 없지 않느냐"고 했어요. 동생은 초등학교 2학년 때 결국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이하 본문 인용)

어느 해 봄날, 2미터가 넘는 곳에서 철근을 지고 가다가 깊이가 7미터도 넘는 우물에 빠지기도 했는데 다행히 우물 안이 묽은 진흙이어서 살아났어요. 하마터면 빠져죽을 뻔 했죠. 나중에 사람들이 나를 위로 끌어 올려서 간신히 죽음을 면하기는 했지만 큰 병이 나고 말았어요. 사장은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않고 단지 감기약 몇 알만을 주더군요.

2003년 8월부터 나는 줄곧 노무공급 청부업자인 쳔모를 따라 일을 했고, 그가 가져온 일거리들은 죄다 더럽고 위험한 일들이었어요. 한 가정전기보일러 공장에서 보온공으로 일을 할 때는 하루에 27위안(한화 약 3510원)을 벌었어요. 보온용 유리섬유가 사람을 찌르면 온몸에 붉은 부스럼이 나기 시작했는데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사장은 나보고 게으름을 피운다고 욕했지요.

우리들은 보통 아침 7시에서 밤 7시까지 일을 했고 어떤 때는 밤 8~9시에야 겨우 퇴근을 했어요. 날이 밝기만 하면 일을 시작한 셈이죠. 우리들 노임은 보통 연말에 결산하는데 보통 돈이 필요할 때는 현장 책임자를 찾아가 빌리는 수밖에 없었어요.

지난해에 우리는 노동계약서를 체결했는데 계약서상에는 의료보험료를 지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병이 나도 보험료를 받을 수 없었어요. 나는 위장병으로 1천 위안(한화 약 1300원)을 썼지만 내 돈을 지불해야 했죠. 일하다 상해를 당해도 그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어요. 건설현장에서 한 젊은이가 다리를 다쳤는데도 일을 계속하다 나중에는 일을 잘 못해서 집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던 일도 있었습니다.

올 5월, 지난해 방을 수리하던 중 다친 아버지 다리가 줄곧 낫지를 않아서 급하게 치료할 돈이 필요한 데다 내 몸도 좋지 않아서 도저히 계속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사장을 찾아가서 올해 번 돈 5천 위안(한화 약 65만원) 이상의 돈을 달라고 했죠, 그랬더니 사장이 준 돈이 고작 50위안(한화 약 6500원)이예요.

얼마나 화가 나던지 곧바로 노동부를 찾아갔죠. 그랬더니 노동부에서는 나보고 법원을 가라고 하더군요. 법원을 갔더니 한다는 말이 사건 접수 기간만 3~6개월이라는 거예요. 시간이 너무 길다고 나보고 다시 노동부를 찾아가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다시 노동부를 갔더니 책임자가 곧바로 쳔모에게 전화를 해서 그에게 '노동법'을 위반했다고 말하더군요.

쳔모는 내가 건설현장에서 알루미늄을 훔쳤다고 모함하면서 그것 때문에 노임을 안줬다고 했어요. 하지만 난 훔친 적이 없습니다. 5월11일 노동부 조정을 통해 청부업자는 노동부에 5일내에 내 노임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했어요. 근데 돌아와서는 얼굴을 싹 바꿀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는 우리 숙소 열쇠를 가지고 가서는 저랑 동생보고 더 이상 현장에서 기거하지 못하도록 했죠.

나하고 동생은 돈이 없었고 여관에서 잠을 자려면 최소한 하룻 밤 10위안(한화 약 1300원)은 있어야 했던지라 우리는 청부업자 집으로 가서 생활비를 달라고 했죠. 그는 문을 열지 않았고 옆에 살고 있던 현장책임자와 그의 아내, 장인 등이 건너와서 우리보고 가라고 욕을 했어요.

현장책임자는 나보고 개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때리는가 하면 나를 발로 차기도 했어요.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칼을 꺼내서 그 다섯 명을 연달아 찔렀어요. 당시 난 너무나 무서워서 곧바로 도망을 갔는데, 냇가에서 핏자국을 씻은 뒤 곧바로 경찰서로 가 자수를 했습니다. (중략)

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기자들의 취재를 지지한다고 해요. 기자들이 나를 취재해서 기사가 나가면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농민공들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구요. 지도자들은 현장에 와서 보면 단지 겉으로 보기에는 큰 건물이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건물 위에서 일을 하면서 조금만 잘못하면 떨어져 죽습니다. 당신들은 얼마나 많은 농민공들이 빌딩을 짓다가 죽은 줄 아십니까?

나도 우리 농민공들을 보호하는 정책이 있다는 걸 알지만 아래 사람들이 집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의 권리는 아직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소원은 아주 간단한 거예요.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금보다 조금만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겁니다. 그들은 평생을 고생 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선량한 마음을 가져서 우리들 농민공들을 업신여기지 않았으면 좋겠고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우애롭기를 바라고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사회가 부디 우리들 농민공들에게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기를 바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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