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추억, 그 곳에 그가 있다

[인터뷰] 가을에 만난 가수, 이용

등록 2005.10.08 11:25수정 2005.10.27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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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여의도 MBC사옥. 10월의 길목에서 만난 가수 이용

여의도 MBC사옥. 10월의 길목에서 만난 가수 이용 ⓒ 나영준

초등학교 시절, 한 동네 사는 친구에게 여고생 누나가 있었다. 얼굴이 꽤나 예뻐 또래 남자들의 관심대상이었지만 정작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새침데기였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방송출연'을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0대 소녀들의 패싸움이 9시 뉴스에 보도됐는데, 그녀가 '활개를 치는' 모습이 그만 카메라에 잡히고 만 것이다.

처음엔 놀랐지만 어린 나이에도 조금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름 아닌 가수 이용과 조용필 팬들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굳이 '동방신기'에 열광하는 이 시대 소녀 팬들이나 69년 클리프 리처드의 내한공연 때 속옷을 벗어 던졌다는 여대생들의 일화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80년대 초반 두 가수 팬들의 충돌은 당시 뉴스의 단골메뉴였던 것이다.


그렇게 얼마 전 평양공연을 성황리에 마치고 국민가수의 입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한 조용필에게도 라이벌이 존재했던 시절이 있었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80년 대 초였고, 동시에 '오빠부대'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녀는 가수 이용의 극성 팬이었다.

예전 소녀 팬들에겐 순수함이 있었다

a '후회'라는 노래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기쁘다고.

'후회'라는 노래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기쁘다고. ⓒ 나영준

가수 이용(49)씨에게 가을은 누구보다 바쁘고 정신없는 계절이다. 항간에는 그의 몇 년치 10월 계획이 미리 잡혀 있다는 소문도 있다. 그런 사정은 이미 알만한 사실임에도 그는 고작 통화 5일 후로 잡힌 인터뷰 일정에도 일일이 지방공연 일정을 설명해주며 미안해 했다.

"바쁜 척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가을만 되면 오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실제 그의 10월 스케줄표는 정말로 빽빽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31일자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10월의 마지막 날은 따로 한 장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소문이 아주 과장만은 아닌 듯했다.

- 예전 팬들의 열광이 대단하지 않았나.
"정말 그랬죠. 조용필씨 팬들하고 갈라져서 싸움도 많이 하고 그래서 9시 뉴스에 '요즘 10대 팬들 이대로 좋은가'라는 이야기가 종종 나왔으니까요. 한번은 제가 부산에서 생방송을 하는데 먹던 배가 날아와서 그대로 안경에 '퍽'하고 맞은 일도 있습니다. 어떡합니까, 생방송인데 끝까지 불렀죠(웃음). 그런데 그 이야기가 퍼지면서 제 팬들 중 한 분이 용필이형이 무대로 나가는데 먹물을 퍼부어 버린 겁니다. 얼마나 난감하던지… 용필이형에게 정말 미안하더군요."


그는 얼마 전 이제는 중년의 아줌마가 된 조용필씨의 한 팬을 만났다고 한다. "사실 오빠도 좋아했는데 예전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곤 "함께 늙어 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고. 그런 그이지만 요즘 10대 팬들의 환호소리를 들으며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한다.

a 당시 '잊혀진 계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잊혀진 계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 이용

"예전 팬들의 함성엔 조작이 없었죠. 정말로 좋아서 소리를 쳤거든요. 지금은 기업화가 되다 보니 오늘 처음 데뷔하는 가수인데도 미친 듯 함성이 터져 나옵니다. 작위적이라는 거죠. 심지어는 '어느 가수에게 소리를 질러야 하냐?'고 묻는 것도 본 적이 있거든요.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고속질주... 추락은 한순간

81년 '국풍81'에 출전한 건 오로지 학교 앞 술집에 달아놓은 외상값을 청산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은 그의 인기는 그때 부른 노래 '바람이려오'를 능가하는 태풍이었다. 82~4년까지 양대 방송사의 연말 가요대상을 휩쓸었고 '잊혀진 계절' '사랑 행복 그리고 이별' 등의 곡을 연달아 히트시켰다.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고속질주, 그러나 한 순간 날개가 꺾이자 남은 것은 추락뿐이었다. 한 번의 스캔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하룻밤의 달콤한 꿈은 추억이 되고 말았다. 혹 그간 '한 마디 변명도 못한' 것이 생채기가 되진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a 82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을 차지한 후.

82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가수왕을 차지한 후. ⓒ 이용

자장면 한 그릇 값이 200원 하던 시절 아파트 한 채 값을 한 달에 벌던 그였지만 한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자 정말로 단 돈 1원 한 장이 없을 때도 있었다고. 그래서 '이제 노래를 그만두어야 되는구나'라는 생각은 해 보았지만 그럴 때조차도 세상에 대한 원망 따위는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가 미국생활을 마치고 어렵게 다시 한국무대에 선 것은 92년 '열린 음악회'. 당시 그는 홍수 같은 눈물을 쏟아내다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그 후로도 그는 방송 중 울음을 자주 보였다.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이냐고 묻자 전혀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원래 눈물이 없었습니다. 예전 '가요 톱 텐' 같은 프로에서 1위를 할 때도 울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머니나 주변 분들이 '기뻐하지만 말고 때론 감격하는 모습도 보여주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요새는…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지 종종 목이 메더군요(웃음). 나이를 먹었다는 거겠지요."

- 가끔 예전 인기가 그립진 않은지.
"…아니요. 건방진 얘기지만 인기란 게 무엇인지 알거든요. 천당과 지옥을 다 다녀봤으니까요(웃음). 귀국 후 한 때는 예전의 인기를 다시 찾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요. 그게 아니란 걸 삶이 가르쳐 주더군요. 결국 제가 잘 할 수 있는 건 노래밖에 없단 걸 깨달았습니다. 인기가 아닌 음악을 따라야겠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겠다

a 아직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인터넷 모임(www.leeyong.net)을 만들어 추억을 나누기도 한다.

아직 그를 사랑하는 팬들은 인터넷 모임(www.leeyong.net)을 만들어 추억을 나누기도 한다. ⓒ 나영준

- 추구하는 음악에 변화는 없는지. 앞으로 하고 싶은 음악은
"제가 하는 음악은 스탠다드거든요. 트롯도 제겐 잘 맞지 않고 그렇다고 신세대 댄스음악을 할 수도 없고 솔직히 알앤비는 제가 맛도 못 내거든요(웃음). 장르적 변화보단 뭐랄까 이젠 조바심의 단계도 지났고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습니다."

어느덧 어린 가수들에겐 '선생님' 호칭을 들을 나이가 가까워진 그. 그는 세대에 따라 시장이 갈라진 가요계 현실이 아쉽다고 한다. "티나 터너 같은 경우 세대를 뛰어 넘어 좋아하지 않냐"며 "신세대, 중년, 노년이 좋아하는 노래가 나뉜 현실이 안타깝다"고.

"그런 면에선 조용필 선배 같은 분이 모범을 보이고 계시죠. 저도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해야겠죠. 그간 '순리'라는 것을 배운 것 같습니다. 억지로 무엇을 하려 하고, 질투해서 따라하고 그런 것들은 수명이 짧다는 것을 느꼈죠. 제게 맞는 시기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 달에는 대학 1학년이 된 아들과 함께 부른 노래가 나온다고 한다. 그가 가요로 부르고 아들은 성악으로 연주하는 형태라고 한다. "팔불출이지만…"하고 운을 뗐지만 자신보다도 두세 배 성량이 풍부하다며 자랑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대한민국의 평범한 아버지였다.

a 80년대, 스타의 사진으로 만든 책받침 한 장 없던 이들이 있을까.

80년대, 스타의 사진으로 만든 책받침 한 장 없던 이들이 있을까. ⓒ 이용

마지막, 아직 그를 기억하고 아껴주는 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눈물이 없다던 그의 목소리가 떨려오며 허공을 바라보는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너무 미안합니다. 저를 좋아했다는 이유만으로 '거봐, 그 사람 뻔하지'라는 손가락질을 주위에서 받았으니까요.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게 마지막 장면이 아니라 '거봐, 내가 이래서 이 사람을 예전에 좋아했다니까'라고 말할 수 있게 해드리겠습니다. 그 후 반듯하게 산다고 노력은 했는데… 이제는 음악적으로도 보답을 해야겠지요."

10월이 다가서며 찬바람에 섞여 옛 추억이 스며들고 있다. 아직 가진 것의 반도 못 보여 주었고 목소리만큼은 자신 있다는 가수 이용. 그에게 10월은 어떤 달일까. 분명한 건 그가 불러주는 '잊혀진 계절'을 들으며 사람들은 쓸쓸한 옛 사랑의 추억에 잠겨들고 그 순간 그는 행복해 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에게 10월의 마지막 밤은 아직 진행 중이다.

원래는 10월이 아닌 9월의 마지막 밤?
이용씨가 들려주는 노래에 얽힌 뒤 이야기

가을의 국민가요, '잊혀진 계절'에도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다름 아닌 '10월의…' 부분이 원래는 9월이라는 것. 작사가인 박건호씨가 어느 해 9월 한 여인과 헤어지게 되었는데, 그날 밤 술에 취한 그는 마음에 담아둔 말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기고 그녀를 보냈다고 한다.

그 젊은 날의 잊지 못할 이별을 가사로 만든 것이 바로 '잊혀진 계절'이다. 다만 당시 레코드 발매시기가 시월의 마지막 밤에 가까워 전략적으로 가사가 9월에서 10월로 뒤바뀌게 되었다고.

"원래는 9월의 마지막 밤으로 녹음까지 마쳤지요. 그런데 10월로 바꾸라는 이야기에 다시 한 번 하게 됐던 겁니다."

또 하나의 이야기, 가수 조영남이 부르는 10월의 마지막 밤은 어땠을까. 당시 그 노래는 작곡가인 이범희씨가 미국에서 막 돌아온 조영남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이용에게 돌아오긴 했지만 조영남의 음색에 맞추어 반주 녹음까지도 끝낸 상태였다고.

"나중에 히트 된 후 영남이형이 굉장히 억울해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웃음)."

스산한 가을밤과 더없이 어울리는 잊혀진 계절. 과연 그 노래를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불렀다면 그 느낌은 어땠을까. / 나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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