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마후라'가 아들이었단 말이냐"

'공사모카페'에서 생긴 삼수생 아들과의 '채팅' 해프닝

등록 2005.12.04 09:46수정 2005.12.0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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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수험생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전념하던 수험생 엄마들이, 노심초사하던 뒷바라지가 끝나면서 '수능뒷바라지증후군'이라는 신종 질환에 노출되어 있다고들 한다. 수험생 아이들 뒷바라지만 하다가 시험이 끝나면서 금단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국 엄마들의 지고지순한 자식사랑의 단면을 보여주는 뉴스다.

수험생 아들을 둔 아빠인 나에게도 올해 최대 화두는 삼수생 아들의 공군사관학교 도전을 위한 수능시험이었다. 공사 지원의 마지막 관문인 수능시험결과에 따라 합격 여부가 판가름 나기 때문에 결과를 초조함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수능시험을 본 아들은 수험표 뒷면에 자신의 답안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적어왔다. 이미 수능시험의 원 점수는 확인된 셈이다. 아들은 시험보고 난 다음날 보따리를 챙겨 불합격에 대비해 논술시험 준비를 하겠다면서 서울로 떠났다.

나는 공군사관학교를 지원한 학생들이 많이 찾는 '공사모'(카페이름)에 들러 수험생들의 동정을 살피는 일이 하루 일과 중 빼 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회원들의 댓글을 살피면서 가능성을 엿본다. 이곳에는 수험생들의 전년도 성적비교와 나름대로 합격여부에 대한 토론의 글들이 줄을 잇는다.

한참 댓글을 읽고 있는 중인데 '빨간마후라'라는 닉네임을 가진 회원으로부터 채팅 초대를 받았다. '공사모카페'에서 사용하는 나의 닉네임은 '쩬틀공사'로 부른다. 지원학생들이 수험생과 학부모를 구별할 수는 없으니 지원학생쯤으로 생각하고 채팅을 요청한 것이다.

엉겁결에 수락은 했지만 더듬거리는 자판실력 때문에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삼수생 아들로 가장을 해야 하는데 마음만 앞서지 독수리타법의 실력은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상대는 나의 조급한 마음을 이해라도 해 주는 듯 터덕거리는 대화를 순순히 기다리는 신사도를 발휘해주었다.

빨간마후라 - "안녕하세요."
쩬틀공사(필자) - "안녕하세요."
빨간마후라 - "이번 공사 수험생인지?"
쩬틀공사 - "네. …ㅋ"
빨간마후라 - "익명사이트에 점수 올린 분이신가요?"
쩬틀공사 - "네. 시험보고 나서 너무 초조해서. 내신도 안 좋고 불안한 마음에..."
빨간마후라 - "님과 모든 과목의 점수가 똑 같음. 사회탐구도 똑같음. 저는 내신은 꽝."


익명게시판에 올린 아들의 성적을 보고 상대방도 같은 점수에 놀랄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수능시험과목 점수가 똑 같을까. 형편없는 내신까지도. 정말,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쩬틀공사 - "사는 곳은?"
빨간마후라 - "전주. 지금은 서울에서 논술학원 다님. 님은 어디?"
쩬틀공사 - "광주촌놈. 다니는 학원은?"
빨간마후라 - "전라도 광주? 다니는 학원은 노량진 OO학원"


사실 이 대목에서도 거짓말을 했다. 전주라고 답하기가 순간적으로 당혹스러웠다. 같은 전주에 같은 점수를 가진 아들과 똑 같은 수험생을 만나다니 길거리를 가다가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만났을 때 난처함 같은, 그래서 시선을 두기가 민망할 때의 순간 같았다.

빨간마후라 - "나는 삼수생 그래서 더욱 초조…ㅋㅋㅋ"
쩬틀공사 - "나도 삼수생…ㅎㅎㅎ 진짜 희한하네요."


당혹감은 정말 극에 달했다. 거울 앞에선 고양이가 거울 속의 비친 자신을 몰라보고 노려보는 형국이랄까. 아들의 성적과 점수 하나 틀리지 않은 사람을 만나다니 이상한 홀림 현상 같았다.

쩬틀공사 - "님은 너무나 나와 똑같음. 진심으로 합격을 기원합니다."
빨간마후라 - "님도 함께 합격했으면 좋겠어요. 멋진 사관생도가 되기를…ㅎㅎㅎ"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채팅은 끝이 났다. 그리고 아내에게 우리 아들과 똑같은 점수를 받은 삼수생이 전주에 산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내도 나의 말에 "세상에 그럴 수도 있나보네. 진짜 라이벌이네"하면서 이야기는 일단락 되고 나는 업무관계로 출장을 떠나야 했다.

전주를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아내의 전화였다. 아들도 똑같은 점수를 맞은 광주촌놈이라는 회원하고 채팅을 했는데 참으로 기가 막힐 정도의 같은 점수를 가진 회원이라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광주촌놈은 나잖아. 그럼, '빨간마후라'가 아들이었단 말이야? 아니, 이럴 수가..."
"세상에..."
"이쯤 되면 다들 스스로 체념 상태가 되어 있으니까 그렇지. 아무튼 아들이었기 망정이지 찜찜할 뻔했잖아."

아들의 전화로 해서 인터넷공간에서 잠시 동안 긴장감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던 상대가 삼수생 아들이었다니 아이러니를 넘어 사이버 소설 속의 이야기 같았다.

사건 전말이 확인되고 배를 잡고 웃었다. 초조함에 찌든 사이버상의 방랑자, 아버지로서의 당당함도 아들과의 채팅으로 속내를 들키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전화를 했다. 아들도 이상하다는 느낌뿐이었지 자신의 점수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빠, '솔향볼스치네'닉네임은 어디 갔어?"
"너무 알려져서 바꿨지. 아들을 몰라봤다니?"

아들이 말한 '솔향볼스치네'라는 닉네임은 오래 전부터 써오던 나의 닉네임으로 '쩬틀공사'로 닉네임을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똑같은 성적과 마음상태까지, 내신까지도 거의 같다는 사실을 놓고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보았지만 아들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아들은 등급이 낮아 '공사모카페'에 글을 쓸 수 없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빨간마후라 휘날리면서 꿈을 펼칠지는 알 수 없지만 인터넷공간에서 수능시험발표를 앞두고 채팅상대가 아들이었다는 사연은 오래도록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네티켓을 잘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사이버공간에서 우연히 아들과의 채팅으로 소중한 경험을 하면서 채팅상대가 나의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인터넷 채팅을 하면서 네티켓을 잘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사이버공간에서 우연히 아들과의 채팅으로 소중한 경험을 하면서 채팅상대가 나의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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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에서 8년, 예술작업공간을 만들고, 버려진폐기물로 작업을하는 철조각가.별것아닌것에서 별것을 찾아보려는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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