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으스스한데...누구냐, 너?"

이제껏 무시했던 감기 덕에 무시무시했던 하룻밤

등록 2005.12.15 15:36수정 2005.12.1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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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일년 내내 병원 한 번 가지 않는 건강한 내게, 너는 그저 흔하고 또 사소한 병(病)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네가 찾아온다 싶다가도 하룻밤 푹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너는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남들 일주일을 앓았다던 아폴로 눈병도 하루 만에 보내 버렸던 나였다.


그래서 나는 "나한테는 그 흔한 감기도 안 오더라. 감기는 날 싫어하고 다른 사람들만 좋아해"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그래서 코 막힘과 기침이 나를 괴롭힐 때도 하룻밤 자고 나면 괜찮겠거니, 너를 무시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어느 영화 광고 카피처럼 나는 앙큼하게 버텼지만 너는 뻔뻔하게 집적댔다. 네가 강해진 걸까, 내가 약해진 걸까. 너는 점점 나를 장악해 가고 있었다.

학교 보건진료소에 가서 증세를 말하고 약을 탔다. 약이라니, 내 인생에 감기약이 등장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말이다. 너는 약의 기세에 잠시 주춤하는 듯 했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여전히 너를 얕잡아 봤다.

다음날 오후 마지막 기말 시험을 앞두고, 약해진 너를 비웃으며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야식 집에서 서빙하는 일이었다. 저녁 바람이 너무 찼다. 그날따라 손님이 많았다. 자정이 넘어서야 덜 바빠졌다. 그리고 몸이 이상했다.

실내에 있는데도 추웠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두통이라니, 내게 두통이라니! 나는 그동안 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보았던가. 내 생각에 두통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에 속하는 것이었다. 신경이 예민한 사람들이 이것저것 신경 써서 생기는 것이라고, 조금만 덜 고민하면 금방 나을 것이라고. 내심 두통약을 먹는 사람들은 자신을 잘 못 다스려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 내게 두통을 안겨준 너, 위대하기도 하여라.


집에 도착하여 씻고 누우니 새벽 네 시. 두통과 코 막힘과 목 따가움과 추위는 완전히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너무 추워서 반소매셔츠와 반바지를 입던 평소와는 달리 긴소매 셔츠에 긴 바지를 입고 누웠다.

몹시 더운데도 으스스 몸이 떨리는, 나로서는 놀라운 경험을 시작으로 그 새벽에 내가 겪은 고통(아, 나는 감히 고통이란 단어를 쓰겠다)은 망각에 망각을 거듭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실로 기억할 만한 것이었다.


잠들지 못한 채(30분 안에 잠드는 것이 당연한 내게는 이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괴로움 속에 뒤척이며 휴대폰을 통해 흘러가는 시간을 가늠하고 있었다. 내 몸을 지배하고 있는 힘은 강력했다.

잠들지도 않고, 깨어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는 사방에서 나를 짓누르는(누워 있는 나를 사방에서 짓누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하기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그것이 전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나는 영혼들이 너무 힘들어서 내게 기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외롭고 불쌍한 영혼들이라는 생각. 내 온몸을 지배하고 있는 이 괴로움은 내게 기댄 이들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힘이 없고 부들부들 떨리는 느낌이었는데 그 순간 나는 내 오른쪽에 기댄 영혼이 다리가 불편한 때문이라고 느꼈다. 그 영혼이 자신의 고통을 내게 얹은 것이라고. 그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는 내가 지금 환상 속에서, 현실도 꿈도 아닌 그 경계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육체적 몸살이 정신을 지배하여 별 희한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어이없기도 했지만 아무려면 어때, 나는 그 순간 절실했다. 이제 제발 저를 떠나가 주세요. 나는 기도했다. 내게 기댄 이들이 떠나면 내 고통도 사라지리라 생각했다.

모두 떠난 것 같은데도 두통이 여전했다. 어서 가 주세요, 제발, 생각하던 나는 그 두통이 내게 있는 것임을, 온전한 나의 것임을 알고는 지금의 내가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싶지만 그때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내 뇌를 꺼내 가 주세요.

휴대폰을 보니 6시쯤이었다. 나는 가장 최근 통화기록이 엄마인 것을 확인하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휴대폰은 발신 정지 상태였고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와 통화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아픈 딸 목소리를 들려주어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저 이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어쩌고저쩌고 하는 목소리를 들으려는 마음이었다. 너무 답답했고 적막 속에 아무렇지 않게 날 짓누르고 있는 이 낯선 몸살이 끔찍했던 것이다. 그런데 신호가 갔다. 나는 얼른 끊었다. 그제야 전날 밀린 요금을 납부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5초. 겨우 5초이니 엄마 휴대폰에 흔적이 남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러기를 바랐다. 나는 어렵고 힘든 일은 절대 엄마한테 말하지 않으니까, 힘든 일은 혼자 해결하는 데 익숙하니까 말이다. 얼핏 또 잠이 들었던 걸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전화했었길래, 무슨 일 있나 해서.

나는 잠결에 잘못 걸었다고 했지만 내 코맹맹이 소리에 걱정스런 목소리의 엄마. 우리의 짧은 통화. 엄마는 건강한 내가 감기 걸렸다는 사실에, 오죽 아팠으면 새벽에 전화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 아파했다.

엄마는 자신은 감기에 걸렸다가 나았다며 약국에 가서 비닐 팩에 파는 약을 사먹으라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나는 엄마가 감기에 걸렸던 사실을 몰랐던 나와 지난 여러 해 동안 감기에 걸렸던 엄마에게 "왜 감기(따위)에 걸렸어" 핀잔만 할 뿐 진심 어린 걱정은 안 했던 나를 생각했다. 그래서 전화를 끊고 나서는 울고 말았다.

감기야, 네가 아무리 애써도 울리지 못한 나를 우리 엄마가 울렸다. 네가 내게 준 고통보다 엄마와의 통화가 더 강하다. 엄마의 목소리가 내게는 약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잠이 들었고 5시간 가까이 깨지도 않고 푹 잤다. 일어나니 한결 몸이 가뿐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게서 점점 멀어져가는 너를 느낀다. 어쩌면 너는 내가 외로워 보여서 이번 겨울 나를 찾아왔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너는 내게 고통 비슷한 것에 대해 가르쳐 주려고 왔었는지도 몰라. 또 어쩌면 내게 엄마의 소중함을 얘기해 주려고 왔던 건지도. 혼자만 잘난 척, 혼자만 강한 척 하지 말라고 내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아, 네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참으로 많다.

그런 너와 함께한 며칠로 인해 이제껏 무시했던 네가 사실은 무시무시하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게. 그동안 건성으로 말했던 인사를 앞으로는 진심을 담아 말할 거야.

"날씨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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