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단편소설] city999 (1)

등록 2005.12.29 19:06수정 2005.12.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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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999

미래 어느 날.

“자자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지금부터 사건번호1021번의 동거소송을 시작합니다. 김철수씨와 조수연씨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서기가 나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 법원의 풍경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복도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에도 인간들의 다툼 때문에 마음이 어지러웠었는데 정형화된 재판장의 분위기는 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깔끔 뜬, 목재로 된 내부구조도 그렇고, 재판장이 입고 있는 짙은 검정색옷도 그렇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는지…….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분에게 드린 오 일 동안의 조정기간 동안 변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의 사무적인 말투가 던져졌다. 질문 같았지만 질문이 아닌. 그녀는 말이 없다.

“좋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
“헤어질 수 없습니다!”

재판장이 동거종료라고 내게 말했지만 법률적인 용어가 무엇이든 간에, 이 부당한 재판과정에 나는 격렬히 항의했다. 애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그녀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재판장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서류를 넘기며 질문했다.

“김철수씨 조수연씨는 자신의 권리를 요구했습니다. 김철수씨의 권리와 동등하죠. 그러나 지금 제시된 기록은 김철수씨의 권리가 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군요.”

재판장의 지시에 의해 홀로그램기록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얼마 전 그녀와 다투던 중 일어난 사건이었다. 나는 폭력을 좋아하지 않으며, 논리가 빈약한 자만이 폭력을 사용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던, 그러나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그녀의 고백은 현실이었다. 그녀가 일방적인 통보와 함께 결별을 요구했을 때 순간 나는 내 이성을 통제할 수 없었다. 그녀가 거실 한편에 가꾸었던 꽃들과 어항이 박살났고 거실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홀로그램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날뛰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재판장이 얼굴을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김철수씨.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합니까?”
“잘못은 저 여자에게도 있단 말입니다!”

내 목소리는 컸지만 공허했다. 판사는 판결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삼년 전 결혼에 관한 법률이 폐지되고 대체 입법화된 동거법에 의해, 동거인 쌍방이 주장하는 모든 권리는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에 관해 본법정은 오 일 동안의 조사과정을 거쳐 조수연씨의 동거종료요구가 정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개인은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 애정을 의식적 당위나 의무로 구속하고 소유할 수 없다는, 동거법 제1조에 의해 원고 조수연이 요구한 동거종료는 정당하다고 판결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동거종료를 인정하며, 또한 김철수의 폭력적인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음으로 김철수는 조수연의 신체 및 거주지로부터 500m 이내에는 접근할 수 없음을 판결합니다.”

판사는 재판 봉을 들어 세 번 두드리고 일어섰다. 나는 삼 년 전의 동거서약을 떠올렸다.

'...에 시행되는 동거 법을 알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 그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할 것임을 나 김철수는 서약합니다.'

순간적인 분노로 인해 나의 권리에 관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내가 얼마나 그녀에게 충실했는지 그녀를 사랑했는지. 나는 그날, 밤늦도록 술에 취했다.

숙취로 인한 갈증으로 뒤척이다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주인님.”

생물로봇 R-six였다. R-six는 가사용 로봇이지만 내 직업에 관한 업무도 가끔씩 도와주고 있었다. 처음 R-six를 데려오면서 나는 그녀의 이름을 순이라고 지어주었다. R-six라는 제품이름보다 순이라는 이름이 훨씬 인간적이니까. 그러나 동거종료를 선언했던 그녀는 로봇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인간과 똑같은 외모를 가진 로봇에게 이름까지 지어주는 것이 꺼림칙하다고 했다.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준다. 로봇이라고 이름이 없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R-six는 기존의 기계적인 모양을 갖춘 로봇과는 다른, 인간을 닮은 생물로봇이기 때문에 이름이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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