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두 내가 시험 잘 보면 기분 좋아?"

인상이 녀석이 빵점짜리를 멸시하는 경쟁사회에 한방 날렸습니다

등록 2005.12.29 19:05수정 2005.12.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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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궁이 불 앞에서 대파를 구워 먹는 인상이 ⓒ 송성영

빵점짜리 인상이 녀석이 드디어 사고를 쳤습니다. 얼마 전 기말고사를 본 모양인데 평균 94점이나 받아왔습니다. 백점짜리가 3개나 된다고 합니다. 줄곧 빵점을 받아 오던 1학년 때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녀석은 3학년 1학기를 마칠 때까지 평균 90점 이상을 받아 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자식새끼 학업 성적 좋다고 자랑거리로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어리석고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정말로 뵈기 싫은 모양샌데 그래도 푼수처럼 자랑 좀 할까 합니다.

그동안 <오마이뉴스>를 통해 빵점짜리 녀석이라고 창피한 줄도 모르고 떠들어 댔으니까 이제는 공부 좀 한다고 주절거려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높은 점수 받아오는 자식 둔 부모들과 합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빵점 맞는 아이들과 그 부모님들을 위해서 좀 더 나불거려 볼까 합니다.

빵점짜리 인상이 녀석은 빵점짜리를 멸시하는 경쟁사회에 보기 좋게 한방 날렸던 것입니다. 점수 따위는 언제든지 갈아엎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백점짜리는 빵점을 받아오기 힘들지만 빵점짜리는 얼마든지 백점을 받아 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시험 보기 며칠 전 녀석이 다른 날과는 달리 뭔가 각오를 단단히 한 듯 내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빠, 아빠두 내가 시험 잘 보면 기분 좋아?"
"좋지~."
"언제는 빵점 맞아두 상관없다며?"

"빵점 맞아두 상관 없지만 그래두 잘 보면 좋지, 너두 좋잖아? 빵점 맞는 거 보다."
"응, 점수 잘 받으면 기분 좋아."
"니가 시험 잘 보면 좋지만, 시험 못 본다 해두 아빠는 기분 나쁘지 않어."

유치원을 한 달도 채 다니지 않았던 인상이 녀석은 한글조차 제대로 익히지 않고 초등학교에 입학했었습니다. 받아쓰기를 하면 빵점 투성이였습니다. 아빠인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이었습니다. 한번 뒤처지면 따라 잡지 못할 것이라고 다들 걱정 했습니다. 그런 녀석이 3년만에 백점짜리를 3개씩이나 받아 오다니, 참으로 대견한 일이 아닙니까?

다른 애들 따라잡기 위해 뭐 특별한 공부를 시켰냐구요? 전혀 없습니다. 빵점을 받아 오던 1학년 때처럼 그냥 그렇게 학교에 갔다 와서 숙제하고 놀고 먹었습니다. 학원 한 번 다녀 본 적이 없고 어떤 학습지를 구독해 본 적도 없습니다. 학교에서 다녀오면 엄마하고 숙제를 했고 시험 보기 며칠 전부터 학교에서 내준 문제집 같은 것을 풀게 했습니다.

아빠인 내가 '애들을 무슨 문제집 푸는 기계 만들 것이냐'며 늘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시험 보기 사나흘 전부터 몰래 문제집을 풀게 했던 것입니다. '특별 과외'를 시켰다면 아내가 내 눈치 보며 시험 문제집을 풀게 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아빠인 나는 늘 신나게 놀라고 했습니다. 마당에서, 개울에서, 둠벙에서, 산에 올라가 땀나게 놀라고 했습니다. 시험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 본 기억이 없습니다. 빵점을 받아와도 혼을 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학교에 갈 때마다 재미있게 놀다 오라고 했지 열심히 공부하라고 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누군가 '그래 니 새끼 잘 났다'고 비아냥거릴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인상이 녀석은 분명 공부하는 데 있어서는 잘난 구석이 없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뭔가를 물어 보면 언제나 '몰라'가 가장 잘 아는 대답이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뭐 배웠냐? 재미난 거 없어?"
"몰라."
"학교에 다녀 온 지 몇 시간이나 됐다고 오늘 배운 걸 몰라?"

녀석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럽니다.

"…아, 아까 학교 갔다 와서 잠 좀 자서 그런가봐."

인상이 녀석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놀기 좋아하고 밥 좋아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촌놈입니다. 다른 것 몰라도 먹는 것 하나만큼은 끝내줍니다. 체중이 40kg도 채 안가는 녀석이 80kg이 넘는 아빠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밥돌이입니다. 밥을 기본으로 하여 못 먹는 게 없을 정도로 다 잘 먹습니다. 심지어는 아궁이 불에 대파와 마늘까지 구워 먹는 별종입니다.

시험 점수를 받아 온 다음날이었습니다.

"아빠 선물 사줘, 우리 반 애들은 시험 잘 보면 엄마 아빠들이 선물 사준데…."
"그럼 걔들이 시험 못 보면 어떻게 한데?"
"혼난데…."

"아빠는 너 시험 못 볼 때, 빵점 받아올 때 혼내 킨 적 있어? "
"없어."
"그럼 점수 잘 받았다고 뭐 사달라고 요구하면 안 되지, 그래야 공평하지."

"그래두 선물 사줬으면 좋겠다."
"그래 좋다. 이건 니가 시험 잘 봤다구 뭐 사주려고 하는 게 아니다. 니가 갖고 싶은 거 뭐여."
"말."

"뭐?"
"말! 사 달라구!"
"진짜 말?"
"그려, 우리 제주도에서 타 본 말 사줘."

"…그 말, …어디서 탈려구?"
"뒷산에서 타구 다니면 되잖아."

송아지 한 마리 살 형편도 없는 아빠에게 따그닥, 따그닥 달리는 말을 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녀석이 다음날 학교에 가면서 오 백 원만 달라고 합니다.

"아빠가 오늘 인심 썼다."
"어? 천 원, 앗싸! 천 원! 애들하고 붕어빵 사먹어야지."

그렇게 녀석은 그 날, 말 타고 달리는 것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천 원 짜리 한 장을 들고 기분 좋게 교문을 향해 야생마처럼 내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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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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