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이함과 무성의가 허 청장 계급장 뗐다

[분석] 농민 사망에서 허준영 경찰청장 사퇴까지

등록 2005.12.29 19:17수정 2005.12.29 20:54
0
원고료로 응원
a

농업의 근본적 회생과 고 전용철·홍덕표 농민 사망 사건 대책위는 지난 28일 오후 서울 서대문 경찰청앞에서 '노무현 대통령 기만적 사과 규탄 및 허준영 경찰청장 즉각 파면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을 마친 참가자들은 경찰청앞에서 노상단식농성에 돌입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a

허준영 경찰청장이 27일 대국민사과를 하기 앞서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물러서지 않았던 허 청장은 이틀 뒤인 29일 사의를 밝혔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9일 오전 허준영 경찰청장이 전격 사표를 제출하면서 농민 사망사건의 파문은 진정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허 청장은 지난 27일에는 경찰청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물러서기보다 정면돌파를 택했지만 불과 이틀만에 무릎을 꿇게 된 것.

허 청장이 '20년 경찰복'을 벗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시위에서 부상당한 두 농민의 잇따른 사망 때문이다. 그러나 사태를 더욱 키운 직접적인 원인은 허 청장과 경찰의 안이한 판단과 무성의한 대응이었다. 경찰이 지난 11월 24일 새벽 6시 30분 고 전용철씨가 숨졌을 당시 심각성을 깨닫고 곧장 진상조사에 착수했다면 '경찰총수 퇴진'과 같은 불명예는 없었을지 모른다.

"전씨는 집 앞에서 넘어져 머리 부딪혔다"

충남 보령 출신 농민 고 전용철씨는 지난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집회에 참가했다가 진압 과정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했고 9일 뒤 뇌손상으로 숨졌다.

경찰은 사건 직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전씨가 집 앞에서 넘어져 죽었다"고 발뺌했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은 전씨가 숨진 다음날인 11월 25일 유해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기고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에 들어갔다. 이날 전농을 비롯한 59개 시민사회단체와 민주노동당은 '고 전용철 농민 살인진압 규탄 범국민대책위(범대위)'를 구성한 뒤 노무현 대통령 공식사과와 허준영 경찰청장 사퇴 등 4개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하지만 경찰은 전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까지 앞세워 "전씨가 집 앞에서 넘어져 머리를 부딪혔다"는 주장을 계속하며 사건을 덮기에 급급했다.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등 농민들의 요구도 철저히 묵살했다.

이같은 경찰의 태도는 농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현장 사진은 알고 있었다

a

고 전용철씨 사망 원인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결과 반박 기자회견이 지난 27일 오후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에서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회견에서는 고인이 15일 여의도 농민대회에서 부상당한 뒤 후송되는 사진과 경찰에 맞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직접 목격담을 발표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1월 27일 시위현장에서 실신한 전씨의 사진 한 장이 발견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날 범대위는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소속 의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열어 국과수 부검 결과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의사들은 "전씨가 넘어져 사망했다는 경찰 주장을 믿을 근거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정치권도 움직였다. 민주노동당은 심상정 원내 수석부대표의 공식 브리핑을 통해 "국회 차원에서 전씨 사망 사건을 진상 조사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다음날인 11월 28일에는 중부권 신당인 국민중심당도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나섰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경찰은 적극적인 반박에 나섰다. 허준영 경찰청장은 28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채증사진 1천여장 중 전씨 모습이 담긴 사진 4장을 찾아냈다"고 말했다.

또 "채증사진 분석결과 전씨는 시위대 뒤쪽에 있어 경찰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며 "쓰러진 모습이 담긴 사진은 오후 6시 17분경 찍혔고 얼굴과 옷 상태가 깨끗해 폭행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찰 책임이 전혀 아니라는 얘기였다.

전용철 농민 이어 홍덕표 농민마저... 경찰, 책임 인정

그러나 사진 한 장의 힘은 경찰의 생각보다 컸다. 허 청장은 "경찰의 폭행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부인했지만 정부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았다.

11월 29일 전씨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황인성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찾아왔다. 황 수석은 "개인 자격으로 온 것"이라고 밝혔지만 그의 조문에서 청와대의 긴장감이 엿보였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각계로 퍼졌다. 학계·여성계·종교계 등은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정부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킬 뿐이었다.

그런 가운데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사지가 마비된 또 다른 60대 농민 고 홍덕표씨의 사건은 이미 불붙어있던 농민들의 반발에 기름을 부었다. 황 수석이 서울대병원을 찾아간 29일 홍덕표씨 사건이 언론에 보도됐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경찰청도 입장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최광식 경찰청 차장은 12월 14일 기자회견을 열고 유감을 표명했다. 전씨 사망과 홍씨 부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한 것이다. 불과 보름 전만 해도 경찰은 발뺌으로 일관하던 상황이었다. 아울러 경찰청은 과잉 시위진압 주범으로 지목된 이종우 서울경찰청 기동단장을 직위해제했다.

'유감'으로는 성난 농심 달랠 수 없었다

a

지난달 15일 여의도 농민집회에 참석한 뒤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인해 부상당한 뒤, 11월 24일 새벽 사망한 고 전용철씨와 12월 18일 사망한 고 홍덕표씨의 영정이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빈소에 함께 모셔져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최 차장이 유감을 표시했지만, 성난 농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12월 18일 끝내 홍씨가 사망하자 경찰은 그야말로 벼랑 끝까지 몰렸다. 노무현 대통령 사과와 허준영 경찰청장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극에 달했다.

12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는 두 농민 사망 책임이 전적으로 경찰의 과잉 진압에 있었다는 공식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다음날인 27일 허준영 청장은 "책임을 통감한다"는 사과문을 발표했고, 노 대통령도 공개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기묵 서울경찰청장도 지휘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이 때만 해도 허 청장은 "사퇴하는 것만이 책임지는게 아니다"라며 물러날 뜻이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사퇴 압력은 더 높아져 갔다. 노 대통령과 허 청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내놨지만 전농과 범대위, 시민단체는 "임기제를 방패 삼아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결국 허 청장은 이틀 뒤인 29일 오전 사표를 제출해야만 했다.

비준안 처리는 국회가, 유탄은 경찰청장이

허 청장이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농민 사망사건 파문도 일단 가라앉을 것으로 보인다. 사실 두 농민 사망 사건은 국회의 '쌀협상 비준동의안' 통과에 맞선 농민들의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쌀협상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킨 주체는 국회와 청와대인데, 엉뚱하게 경찰청장이 '유탄'을 맞고 쓰러진 셈이다.

범대위는 오는 31일 오후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고 전용철·홍덕표씨 장례식을 범국민장으로 치를 예정이다. 따라서 농민 사망을 둘러싼 갈등은 조만간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범대위는 '이종우 기동단장 형사 처벌', '농업의 근본적 회생 대책' 등 다른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며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밝혀 불씨는 여전히 남은 상태다.

고 전용철·홍덕표씨 사건 일지

▲11월 15일 여의도 농민집회, 고 전용철·홍덕표씨 부상
▲11월 17일 전씨 병원 입원, 뇌손상 발견
▲11월 24일 새벽 6시30분 전씨 사망
▲11월 25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전씨 유해 부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안치, 범대위 구성
▲11월 26일 언론 "전씨 집앞서 넘어져 뇌손상" 경찰 발표 보도
▲11월 27일 시위현장 전씨 사진 발견, 인의협 "국과수 발표는 자의적 해석" 반박
▲11월 28일 민주노동당·국민중심당 '진상규명' 요구, 허 청장 "전씨 폭행 흔적 없었다" 책임 부인
▲11월 29일 황인성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조문, 홍덕표씨 '사지마비' 언론보도
▲12월 1일 전농, 민주노총 등 진상규명 촉구 범국민대회 개최
▲12월 14일 최광식 경찰청 차장 '유감' 표명, 이종우 단장 직위해제
▲12월 18일 고 홍덕표씨 사망
▲12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 '공권력에 의한 사망' 공식 발표
▲12월 27일 노 대통령·허 청장 대국민사과, 이기묵 서울청장 사표 제출
▲12월 29일 허 청장 사표 제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휴대폰 통째 저장' 논란... 2시간도 못간 검찰 해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