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격훈련 일등 해서 얻어낸 전화 한 통

훈련소에 있는 막내 소식을 친정엄마께 들었습니다

등록 2005.12.30 10:32수정 2005.12.3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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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27일)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국에 계신 친정엄마 전화였습니다.

"엄마? 아침 일찍 어쩐 일이세요? 집에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일은 무슨, 소연이 자냐?"
"어젯밤에 늦게 자더니 아직도 쿨쿨 자요. 눈피해는 없죠?"
"여그는 괜찮은디 저쪽 부안이랑 정읍은 말이 아닌갑더라."

"날씨 추워서 막내가 훈련소에서 고생이겠어요."
"안글도 너한테 막내 전화 온 거 얘기 했는가 싶어서 전화했다."
"아니요? 막내 전화 왔어요? 훈련소에선 전화 못한다던데…."
"며칠 전에 전화 한번 왔었다."

한국에 눈이 많이 와서 온통 눈소식으로 시끄러울 때 눈 없는 이곳에선 눈이 그립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차 싶어 생각하니 11월말에 군에 입대한 막내가 떠올랐습니다. 눈에 대한 그리움은 어디 가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동생 걱정이 되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몸은 건강한지, 입대할 때 편도가 부운 채로 갔는데 괜찮아졌는지….

누나들 속에 자라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어딘가 모르게 여성스러운 동생이었습니다. 딸 넷에 아들 하나라 귀하게 대접받으며 자랐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부모님은 늘 똑같이 대했고 옷도 누나들 옷 중에 남자 옷 같은 것은 대부분 물려 입혔습니다.

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다닌 저는 주말마다 순창 시골집에 내려갔습니다. 그때마다 큰누나인 저를 무척 잘 따르던 남동생은 날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런 녀석이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곤 했습니다. 저녁상엔 고기반찬과 맛난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다음날 다시 전주로 가는 저를 배웅하며 넷째와 막내가 버스승강장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큰누나, 큰누나가 만날 집에 왔으면 좋겠어."
"이구 이 녀석, 누나 다음 주에 또 오께. 누나 보고 싶어도 참아?"
"있잖아 큰누나, 누나만 오면 엄마가 맛있는 거 많이 해주니까 좋아. 우리 일주일 동안 만날 똑같은 반찬만 먹어."

저와 11년 터울인 그 어린 녀석의 말을 듣고 다음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오가는 버스가 와서 차에 올랐습니다. 멀어지는 버스 꽁무니를 향해 한참동안 손을 흔들던 '쬐그만한' 동생들 때문에 전주 가는 내내 마음이 울적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남동생은 중학교 때까지도 엄마 젖을 만지며 품안에 파고들 정도로 귀여운 녀석이었습니다. 밥을 다 먹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어나서 물을 떠다 날랐고 초등학교 때는 바쁜 엄마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도시락도 손수 싸서 다니던 아이였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많이 변한 듯합니다. 동생이 중학교 3학년일 때 결혼을 한 저는 막내의 그런 변화를 알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친정에 통화할 때마다 엄마의 한숨이 깊어져서 여쭈어보니 막내가 사춘기가 왔는지 대꾸도 잘 안하고 시골일이 많아서 뭐 좀 시키면 게으름을 피운다고 했습니다.

막내에게 형이 한 명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그때 참 많이 들었습니다. 누나로서 할 수 있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남동생의 고민이 무엇일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싶었습니다.

동생이 고3 수험생이 되었을 때 큰 딸 아이를 임신해서 친정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친정엄마에게 들은 남동생의 모습과는 달리 무척 밝았고 큰누나인 제게 말도 많이 하기에 별 문제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갈수록 곁에서 지켜보니 동생은 부모님 말씀에 약간의 반항기가 섞인 대꾸를 했습니다. 묻는 말에도 퉁퉁 거렸습니다.

하루는 동생의 그런 행동으로 인해 엄마가 화를 참지 못하고 대성통곡하며 동생을 나무랐습니다. 동생 역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듣기만 했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만 보던 저는 그날 저녁 동생에게 편지 한 통을 썼습니다. 별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내에 대한 이 누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적었습니다. 만 원짜리 한 장과 같이 편지를 필통 속에 몰래 넣었습니다. 그 뒤 동생의 행동이 좀 달라 보였습니다. 며칠 후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온 동생이 "누나 잘 쓸게. 고마워"라며 멋쩍게 한마디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면서 부모님 품을 떠나 전주에서 누나들과 생활하던 남동생은 제법 철이 많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잠이 많은 건 어쩌지 못했지만 1학년 마치고 입영 신청을 한 동생이 9월 입대를 앞두고 있어서 군대 가면 달라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새끼 손가락을 다쳐 수술을 하는 바람에 입대 날짜가 연기되었고 결국 11월에 입대를 했습니다.

남자라서 그런지 살가운 표현을 잘 하지 않던 동생이지만 항상 제 마음 속에는 어릴 때 큰누나를 잘 따르던 그 막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멀리 있어 얼굴도 못 보고 입소할 때 그저 여비나 하라고 용돈 부치는 것으로 마음을 대신했습니다.

소식이 무척 궁금했는데 친정엄마께서 제 마음을 아셨는지 막내전화를 받으시고는 그소식을 전해주시려 아침 일찍 전화를 주신 것입니다. 훈련소에선 전화도 못 한다던 동생이 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사격훈련에서 일등을 했는데 대장이 일등 했으니 소원을 말해보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소원으로 부모님께 전화 한 통 하게 해달라고 했답니다.

"엄마, 막내가 뭐라고 해요? 잘 지낸대요?"
"응, 잘 지내고 있응게 보고 싶어도 참고 훈련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허더라. 그놈 자식이 글도 소원으로 전화 한 통 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 생각할수록 맘이 짠허다."
"그러게요. 그래도 다행이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고등학교 때 엄마랑 티격태격 하며 적잖이 속 썩이던 녀석, 훈련받으며 부모님 생각 많이 났나 봅니다. 소원으로 부모님께 전화 한 통하겠다고 했다는 그 말이 전화를 끊고 나서도 계속 제 마음을 후벼댔습니다. 며칠 있으면 한국에 가는데 동생이 퇴소할 땐 꼭 얼굴 보러 가야겠습니다. 벌써부터 우리 막내의 늠름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막내야 기다려라. 누나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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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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