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기다리는 마음 7

등록 2005.12.30 08:57수정 2005.12.3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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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언덕 위 커다란 나무 앞에 땅을 파고 강아지가 잠들어 있는 하얀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윤 할머니의 화원에서 가져 온 반쯤 핀 국화 세 송이를 강아지가 잠든 흰 상자 위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좀 전에 파냈던 흙으로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소년도 소녀도 아무런 말이 없다. 기다렸다는 듯이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곧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소년은 재빨리 웃옷을 벗어 소녀의 어깨 위에 걸쳐주었다.

“하필이면 지금 내릴 게 뭐람…. 유리 너… 감기 걸리겠다, 빨리 돌아가야겠어.”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나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소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고는 방금 만들어진 작은 동산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유리야, 너 감기 걸리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빨리 일어나. 돌아 가야해.”
“싫어. 조금만 더 있자. 응? 수빈아…. 어떻게 초롱일 혼자 두고 가…. 초롱이 깜깜해서 무서울 거야. 비도 오는데 어떻게 혼자 둬. 조금만, 조금만 더 있자. 응? 수빈아….”
“또 고집 나온다. 안 돼, 봐, 벌써 다 젖었잖아. 비 그치면 다시 오자. 응? 유리야 그만 일어나. 너 이러는 거 초롱이 좋아하지 않을 거야. 네가 아프면 초롱이가 좋아할 거 같아? 아니지? 그러니까 나중에 비 그치고 다시 오자.”

소년의 말 속에는 조금의 짜증도 불만도 섞이지 않았다. 단지 소녀에 대한 걱정이 담겼을 뿐이다.

“수빈아….”
애처로울 정도로 간절한 소녀의 목소리가 소년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소년은 슬픔에 젖은 소녀의 눈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는 할 수 없다는 듯 소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어쩌면 소년도 소녀의 뜻처럼 강아지의 곁에 있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소녀보다도 강아지의 곁에 있고픈 마음이 더 간절했을 것이다. 소년에게 있어 강아지는 늘 함께한 친구였으며, 먼저 보낸 동생 대신이었다. 그런 강아지를 잃은 소년의 마음은 소녀보다 훨씬 아프고 쓰라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소녀 앞에서 내색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결코 강아지의 죽음이 소녀의 탓이라 생각진 않았다. 단지 강아지의 사고가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는 소녀에게 더 이상 마음의 짐을 얹혀 주고 싶지 않음에서였다.

한동안 그렇게 소년과 소녀는 방금 생긴 작은 동산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소녀가 머금고 있던 눈물 보를 터뜨렸다.

“미안해 초롱아. 미안해 수빈아. 흐흑… 내가 잘못했어. 날 용서 하지 마. 미안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초롱아, 초롱아 우리 예쁜 초롱이. 다음 생이 있다면 내가 꼭, 꼭 널 지켜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흐느낌으로 시작되었던 소녀의 울음이 통곡에 가까워지자 소년은 가만히 소녀의 어깨를 감쌌다.

“유리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초롱이 너 미워하지 않아. 원망하지도 않아. 내가 알아.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응?”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소년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소년의 품에 안긴 채 흐느끼던 소녀가 갑자기 꼬꾸라진다. 놀란 소년은 소녀를 들쳐 업었고 서둘러 언덕을 내려 왔다.

비가 쏟아진 지 한참이 지나도 언덕에 올랐던 소년과 소녀가 소식이 없자 걱정스러운 마음에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선 할머니들은 소녀를 업고 돌아오는 소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한 소년은 할머니들의 도움으로 소녀를 방에 눕혀놓고 나오다 쓰려져버렸다. 할머니들은 구급차를 불러 소년과 소녀를 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처치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그날 이후 며칠을 이불 속에서 고열과 시름을 해야만 했다.

먼저 병석을 털고 일어난 건 소년이었다. 소년이 소녀를 찾아갔을 때까지도 소녀는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루에 한번 의사가 왕진을 왔고, 간호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줄곧 병원 생활을 해야 했기에, 병원 얘기만 나와도 치를 떠는 소녀였다.

소년은 그런 소녀 곁에 앉아 소녀가 필요한 것을 챙겼다. 잠이 든 소녀를 가만히 보고 있다 이불을 고쳐 덮어주기도 하고, 악몽을 꾸는 듯, 소녀의 얼굴에 새벽이슬 같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때면, 그것을 닦아 주기도 했다.

소녀는 가끔 강아지의 이름을 부르며 괴로워했다. 그럴 때면 소년은 가만히 소녀의 손을 잡고 조용하고 따뜻한 음성으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괜찮다고, 꿈이라고 말하는 소년의 말을 들은 것인지 소녀는 소년의 말에 다시 편안한 얼굴로 잠이 들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서야 소녀는 안정을 찾은 듯 해보였다. 대기 중이던 간호사가 하루에 한번 의사를 대신해 왕진을 왔고, 늘 곁에서 소녀를 지키는 소년에게 주의 사항이나 필요 사항 등을 알렸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지나서야 소녀는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수빈아…초롱이 좋은 곳으로 간 거겠지? 그렇지?”

소녀가 강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이후 어느 누구도 꺼내지 않았던 말이었다.
소년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 말이 없다.

덧붙이는 글 | 제가 즐겨 찾는 야사모라는 인터넷 동호회에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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