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약속을 지키려 찾아온 요셉씨

12년 전 첫 아이를 잃은 제수씨가 아이의 곁으로 갔습니다

등록 2005.12.30 13:55수정 2005.12.30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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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12년 전인 1993년 가을의 일이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를 동네의 '샘골가든'이라는 음식점에서 했다. 날씨도 좋았고 손님도 많았다. 우리 집에서 마련한 음식들도 호평을 받았다. 즐겁고도 흐뭇한 잔치였다.

그런데 잔치가 거의 끝나가던 오후 3시경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발생했다. 내 가운데 동생의 네 살배기 사내아이가 음식점 옆 뜰의 분수(噴水)가 있는 연못에 빠져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할머니의 칠순 생신날이었다. 할머니의 고희 잔치를 하던 그 장소에서 손자 아이가 연못에 빠져 죽었으니, 그 같은 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 것인가.

어머니는 당신 칠순 잔치를 자시다가 손자 녀석을 잃은 기가 막힌 현실 속에서 넋을 잃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첫아이를 잃은 동생 부부도 망연자실, 참담한 슬픔을 안아야 했다.

동생 내외는 그렇게 첫 자식을 가슴에 묻었다. 자식을 가슴에 묻은 슬픔을 안고 살았다. 그 슬픔을 세월 속에서 어서 잊도록 하기 위해 나는 동생 부부에게, 특히 제수씨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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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7일 전주시 풍남동 '경기전'에서. ⓒ 지요하


다음날 내 매제 중 한 사람이 서산경찰서로 가서 사실 얘기를 했다. 샘골가든 분수 연못의 실상을 말했다. 위험 방지 시설이 전혀 없는 것에 대한 원성을 토로한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전해 듣고 나는 매제에게 야단을 쳤다.

서산경찰서에서 내게로 전화가 왔다. 태안읍 동문파출소에서도 직원이 왔다. 샘골가든 주인을 형사 입건하겠다고 했다. 나는 반대했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웃 간에, 또 같은 천주교 신자 사이에서 발생한 일이니, 일을 크게 벌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이를 잘 챙기지 못한 우리 잘못도 크니, 그 일을 사건화 하지 말고 그냥 덮어달라고 했다.

내 부탁이 하도 간곡하니 경찰은 마음을 돌렸다. 대신 내게서 약속을 받았다. 이후로 내 쪽에서 절대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내 간곡한 요청과 약속이 주효해서 그 일은 경찰이 관여하는 사건으로 확대되지 않고 간단히 무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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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전주시 풍남동 '경기전'에서 부부 함께. ⓒ 지요하


그 날 저녁 샘골가든 사장이 두 명의 대자와 함께 우리 집엘 왔다. 태안천주교회 초창기 신자 중의 한 사람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신 분이기에 우리 집과는 우선 신앙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과거에 본당 총회장을 지내신 분이기도 했다.

그 분은 내게 돈 봉투를 내놓으며 이런 말을 했다.

"보상금 차원으로는 생각하지 말게. 어린아이 영혼에 무슨 죄가 있을까마는, 어린아이의 영혼을 위해 미사 봉헌도 해야 할 테니, 미사예물로 쓰라고 가져온 것일세. 아우가 나대신 동생에게 내 뜻을 잘 전해주고 이해를 좀 구해주게."

나는 일단 돈 봉투를 받아두었다. 어머니와 함께 봉투를 열어보니 300만원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런 일에 돈을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여. 자칫 보상을 받았다는 헛소문도 날 수 있고…. 이 돈을 받으면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 영혼에 누가 되어. 그러니 한솔 애비헌테 자세한 얘기를 해주고 이 돈을 요셉씨헌티 돌려주도록 허여."

나는 곧 동생 집으로 가서 어머니와 의논한 얘기를 해주고 샘골가든 사장에게 돈을 돌려주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동생 부부는 그렇게 하자고 했다.

나는 다음날 새벽 성당에 가서 아침미사에 참례하고 나오는 길에 백성수 시몬 신부님께 사정을 말하고 우리 가족의 의향도 말씀드렸다. 그러자 신부님은 좋은 생각이라며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집에 들러 돈 봉투를 가지고 샘골가든 살림집으로 갔다. 이 요셉 회장은 아직 잠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아침미사를 지내고 온 깨끗한 마음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돈을 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다른 불순한 뜻이 있어 돈을 돌려 드리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돈을 받으면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의 영혼에 누가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니 달리 생각 마시고 이 돈을 도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이 요셉 회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흔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돈을 돌려받는 것이 좋겠네. 그 대신 내 한 가지 약속을 하지. 지금 지 회장 제수씨의 뱃속에 둘째 아이가 있는 모양인데, 그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이름으로 내가 교육보험을 하나 들겠네. 그리고 매월 그 교육보험을 치르는 것을 내 의무로 삼겠네."

"그건 형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희가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니, 그 점도 잘 헤아려 주시고…."

그리고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이 요셉 회장의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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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풍남문 앞에서. ⓒ 지요하


그 후 1년쯤 지난 때부터 우리 가족은 종종 샘골가든에 가서 음식을 먹곤 했다. 아이를 잃은 집이라 해서 기피하거나 어쩌지 않았다. 아이 생각이 나고 그 날의 슬픔이 상기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극복하려고 애썼다. 어머니도, 우리 부부도, 동생 부부도 그 집에서 갖게 되는 이런저런 모임 자리를 사양하지 않고 구애 없이 참석하곤 했다. 나는 우리 가족의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특히 어머니와 제수씨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곤 했다.

제수씨는 첫 아이를 잃은 그 해 둘째 아이를 낳았다. 역시 아들이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 아이는 자라서 초등학교에 가게 되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무렵의 어느 날 저녁, 나는 동네의 한 상가에 문상을 갔다가 샘골가든 이 요셉 사장을 만나 음식상 앞에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와 술잔을 나누다가 문득 옛날 일이 생각나서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제 조카아이가 올해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 아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형을 잃는 사고가 났는데, 세월이 참 빠릅니다. 그때 일 기억나십니까?"
"내가 그 일을 잊을 수 있나…."

"그때 형님이 내게 하신 말씀이 있지요. 엄마 뱃속에 있는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 앞으로 교육보험을 하나 들어주시겠다는 말…."
"그려. 그런 약속을 했지."

"어떻게 잘 실행하고 계십니까?"
"부끄러운 얘기지만 아직 그걸 실천하지 못하고 있네."
"그래요? 전 그 일이 잘 실행되고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는데…. 무척 실망스럽고 섭섭하군요."

나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실망감과 섭섭함을 표시했다. 정말 서운하고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얘기를 길게 끌고 가지 않았다. 그가 그 일을 완전히 잊지 않고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안했다.

"내가 그 일을 잊지 않고 있으니께 언젠가는, 내가 죽기 전에는 반드시 실행을 헐 거여. 그러니께 날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라구."

취기도 실려 있는 그의 말을 나는 믿고 싶지 않았다. 정말 서운하고 불쾌한 노릇이었지만 나부터 그 일을 잊고 살기로 했다.

그 후로 우리 가족은 그 일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샘골가든 사장의 그 약속 불이행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섭섭한 마음도 버렸다. 여전히 아무 구애 없이 샘골가든을 다니며 음식을 먹었고, 성당에서나 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면 옛날처럼 허물없이 정답게 대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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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처녀 시절의 추억이 깃들여 있는 전주시 '치명자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 지요하

또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2005년 12월 14일을 맞았다. 12년 전에 첫 아이를 가슴에 묻고 살아온 내 가운데 제수씨가 뇌혈관 기형에 의한 뇌출혈로 인천 인하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긴박하고도 슬픈 시간이었다.

13일 논산 대건고등학교 신입생 예비소집에 아들녀석을 데리고 가는 일로 12일 저녁 집에 내려왔던 나는 병원비 중간 계산 청구서를 가지고 돈을 마련하는 일로 14일 아침 일찍 집에 온 동생을 먼저 인천으로 보내고 나서 집에서 이것저것 잔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우리 집을 찾은 손님이 있었다. 샘골가든 사장 이돈형 요셉씨였다. 그는 내 제수씨 상황을 묻고 걱정을 하면서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리고 그는 품 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특히 뇌수술은 병원비가 많이 든다구 허데. 내가 옛날 교육보험 약속을 지키지 뭇헌 일두 있구 헤서…. 병원비에 보탰으면 허구…."

나는 고마움을 표하며 봉투를 받았다. 수표가 든 듯 얇게 느껴지는 봉투였다. 곧 자리에서 일어선 이돈형 요셉 사장은 함께 기도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다. 현관 밖에까지 배웅을 하고 들어온 나는 봉투 안에 든 수표들을 꺼내 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투 안에는 10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이 들어 있었다. 거금 천만 원이었다. 어머니는 금세 눈시울을 적시며 "이건 필시 하느님께서 허신 일일 거여"라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날 저녁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우선은 하느님께 감사해야 헐 일이여. 우리가 상상도 허지 않았던 일이니께…. 그 돈에서 백만 원을 떼어 하느님께 바쳐야 혀. 내일 병원에 가거들랑 규왕아배헌티 잘 말허구, 백만 원을 떼어놓았다가 꼭 하느님께 바치도록 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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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 '치명자산'에서 두 형제 가족이 함께. ⓒ 지요하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100만원을 떼어놓고 900만원만 가지고 병원으로 갔다. 병원비는 묘하게도 900만원 정도 들었다. 15일 오후에 중간 계산 620여 만 원을 지불했고, 20일 제수씨를 태안의료원으로 이송할 때 퇴원비 170여 만 원을 지불했다.

그리고 나는 제수씨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날인 23일 오후 남은 돈 100만원을 가지고 성당 사제관을 찾았다. 구본국 베난시오 신부님께 12년 전의 샘골가든 일을 말씀드리니 신부님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그때의 일을 대략 알고 계셨다. 나는 이돈형 요셉 사장이 천만 원을 가져온 사실을 말씀드리고 100만원이 담긴 봉투를 신부님께 드렸다.

"하느님과 이돈형 형님께 감사하는 마음 한량없습니다. 우리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의 영혼을 위해 앞으로 50일 동안 위령미사를 봉헌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잖아도 요안나 자매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이 많을 것 같은데, 더 잘 되었습니다. 우리 태안 성당 신앙 공동체 안에 또 한 가지 미담이 만들어졌습니다. 나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참으로 영성이 충만하고 매사에 열성적인 신부님은 기쁨과 감사의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요즘 우리 태안 성당에서는 매일같이 모든 주일 미사와 평일 미사에서 신부님의 음성으로 강은실 요안나의 이름이 불려진다. 비록 첫 아이를 가슴에 묻은 슬픔을 안고 살아왔고, 그때로부터 겨우 12년을 더 살고 나서, 자신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뇌혈관 기형에 의한 뇌출혈로 인해 병상에서 참혹한 고통을 겪다가 지난 20일 하늘나라로 갔지만, 예쁘고 착했던 내 제수씨 강은실 요안나는 하느님 곁에서 영생 영복을 누리리라 믿는다.

그런 믿음이 우리 가족들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것임을 또한 굳게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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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전북 익산시 '나바위성당'에서 두 형제 부부 함께. ⓒ 지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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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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