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민 보호'는 일본 대외침략의 단골 명분

상하이 총영사관 자살사건 분석 2편

등록 2005.12.30 14:54수정 2005.12.30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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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중·일 간에는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직원 자살사건을 두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해당 직원이 자살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장이 일치하는 반면, 자살 전에 중국측이 심리적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중국측은 일본 총영사관 직원이 불법적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는 반면 일본측은 중국이 여자 문제를 무기로 정보를 빼내려 했다는 것이다.

1편 기사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중·일 간 공방의 본질은 진실 규명이 아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금년 상반기의 외교적 수세를 만회하기 위한 의도에서 1년 7개월 전의 사건을 다시 끄집어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주변국인 우리가 특히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일본이 이제까지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대외침략을 감행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번 사건도 자국민 보호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안인데, 일본이 향후 이 사건 혹은 유사한 사건을 빌미로 무력을 동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특히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이 향후 그러한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이 지난 131년간 유사한 행동을 보인 전례가 많기 때문이다. 다소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무속인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기초로 미래를 점친다는 학설이 있다. 무속인들이 과거만큼은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초과학적인 방법으로 의뢰인의 과거에 관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데이터를 기초로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한다는 것이다.

이 글 역시 유사한 방법에 기초하여 일본의 미래행동을 예측하고 있는 것이지, 일부 일본인들의 항변처럼 단순히 일본을 음해하기 위하여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이제까지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해 온 행위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1874년 대만침공 1871년 11월 27일 69명이 탑승한 오키나와(당시 명칭은 '유구') 국적 선박이 풍랑으로 대만 동해안에 표류했다. 이 중 3명은 익사하고 55명은 대만 원주민들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12명은 한족들의 도움으로 본국인 오키나와로 귀환했다. 당시 오키나와는 엄연히 독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오키나와가 자국에 조공을 한 사실이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도 일본의 일부라면서 1874년 5월에 대만침공을 감행했다. 이 사례는 외국인을 자국민이라고 주장한 뒤에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대외침략을 감행한 경우에 해당한다.

1875년 강화도사건 당시 조·일 양국 군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조선 군인 35명이 전사한 데 비해 일본군측에서는 단 2명 만이 경상을 입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은 이를 빌미로 개항을 강요하였다.

1894년 청일전쟁 1894년 4월 29일(음력)의 내각회의(閣議)에서 일본이 조선 파병의 명분으로 든 것은 '공사관·영사관·자국민 보호'였다.

1932년 상하이 사변 1932년 1월 18일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인 승려들과 중국인들이 충돌하였다. 이 싸움에서 일본인 1명이 사망했다. 1월 20일 일본측은 중국정부를 상대로 "48시간 이내에 만족스러운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일본군이 자유롭게 행동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상하이시 정부가 일본측 요구를 수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해병대는 장갑차 20여 대를 동원하여 상하이에 출동하였다.

1937년 노구교 사건 1937년 7월 7일 밤 중국 베이핑 근교인 노구교 부근에 주둔한 일본군 진영의 위로 10여 발의 총탄이 지나갔다. 총탄이 부대 위로 지나갔기 때문에 당연히 사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그 직후에 중대장이 병사들의 수를 세워 보니 1명이 부족했다. 이를 빌미로 일본군은 중국군 제29군을 상대로 공격을 개시했으며, 이것이 중일전쟁(1937~1945년) 발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7월 7일 밤에 사라졌다는 그 일본 군인은 나중에 부대에 복귀했다. 그는 일본군 부대 위로 총알이 지나갔기 때문에 신체적 피해를 입은 게 아니라, 사건 당시 아예 부대에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측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허무맹랑한 구실을 내세웠던 것이다.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대외침략을 감행한 것은 위에 소개한 사례들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지금도 동일한 전략을 답습하고 있다. 북일관계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일본측이 '납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북한에 자진 입북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이미 북한에서 사망했고 북한측이 유골을 반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소위 '납치 피해자'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측은 이번에는 자국 총영사관 직원의 자살을 구실로 중국에 대해 다소 황당하다고 할 수 있는 외교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일본의 의도가 주변국을 도덕적 패륜아로 낙인찍어 주변국들의 도덕적 비난을 회석화시키는 데 있음은 1편 기사에서 충분히 언급한 바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은 이제까지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외국에 대해 외교적 공세를 가할 뿐만 아니라 대외침략을 거리낌 없이 감행해 온 나라다. 그러므로 한국정부나 한국 국민들은 앞으로 일본이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한국에 흠집을 낼 가능성에 대해 항상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특히 일부 '지나치게 애국적인' 한국인들은 대중 교통수단이나 길거리에서 일본 관광객들에게 불필요한 시비를 거는 경향이 있는데 위 노구교 사건에서 본 바와 같이 일본은 자국민 1명의 안전을 빌미로 대규모 대외침략을 감행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공연히 불필요한 외교적 시비에 휘말려 우리 민족의 진로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영토 내에서 일본인이나 일본 기업과 관련된 형사사건이 발생한 경우에 일본측이 관련자의 신병이나 증거물 등을 확보하기 전에 한국 사법기관이 신속히 관련자의 신병과 증거물 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인이 피해자인 경우라도 소송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어떻게든지 일본인 피해자의 신병을 국내에 확보해 두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지난 131년간 일본이 보여 준 행동을 볼 때에 일본측이 사건 자료를 먼저 확보하는 경우에는 진상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 중·일 간에 벌어지는 일본인 자살사건은 일본이 1870년대 이후의 탈아외교·함포외교 단계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뉴스 615>에도 동시에 실리는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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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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