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나간 마녀들, 그 베일을 벗다

전경린 신작소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등록 2005.12.30 15:10수정 2005.12.30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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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은 '귀기의 작가'라고 불린다. '지옥의 입구에서나 들을 법한' 극단적인 고통을 담아낸 유려한 문장은 물론이거니와 그녀의 소설에는 언제나 위험한 마녀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마녀들, 그녀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녀들은 마치 메두사와 같다. 포세이돈과 사랑을 나눴지만 장소가 신전이라는 이유로 신의 뜻에 의해 '괴물'로 불리며 홀로 죄값를 치러야 했던 것처럼 전경린의 마녀들은 실상 타인에 의해 마녀가 된다. 사회를 유지하는 가치관 예컨대 가부장제도나 일부일처제를 옹호하는 법과 도덕 등에 의해 마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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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 이룸

하지만 시선을 달리해보자. 결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자는 남편만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걸까. 만약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남편은 자신의 출세 길에 누가 될까 싶어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며 그녀를 집 안에 내팽개친다. 이럴 때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도망친다면 그것은 정말 마녀행위로만 볼 수 있을까? 그렇다. 기득권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녀는 마녀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삶을 선택하는 행위를 했을 뿐이기도 하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의 주인공 혜규도 마찬가지. 가정이 있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 그녀는 남자로부터 도망친다. 아니, 남자로부터 도망친다는 말보다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몇 년 만에 시골집으로 돌아갔다는 말이 맞을 게다. 때문에 다른 작품들과 달리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서는 화자가 직접 지옥의 문턱을 다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 처한 가족들을 통해 지옥의 문턱은 표면 위로 등장한다. 다시 '마녀론'이 부각되는 것이다.

중심인물은 혜규와 혜규의 형제들이다. 혜규의 오빠인 혜도는 자신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첫사랑 순이를 잊지 못해 미쳤다는 소리를 듣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다. 하지만 전처럼 온전하지는 않다. 건달 세계의 똘마니 같은 그는 흥청망청 살아갈 뿐이다. 아버지들의 눈, 사회의 눈으로 보면 혜도는 정신 나간 얼간이다. 하지만 혜도의 사랑은 어떤가.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닐까. 그것을 잊지 못해 미쳐버린 그 남자를 누가 과연 당당하게 욕할 수 있을까?

혜규는 어떤가. 전경린 소설의 전형적인 마녀를 보여주는 그녀는 결혼하기 며칠 전 남자가 다른 여자와 여관에 들어간 것을 알게 되고 자살을 시도한 경력이 있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났지만 그 후로 남자들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사랑은 또 어떤가. 그녀에게 사랑이란 부질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자가 다가온다. 그런데 그는 유부남이다. 다만 가정을 벗어나고 싶어 안달하는 유부남이다. 이럴 때 혜규와 남자는 어떻게 돼야 하는 걸까? 혜규는 정말 마녀일까? 그 남자에게는 메시아와 같은 그녀인데도?

눈에 띄는 사실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에는 마녀의 반대편에 위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 동안 제3자로 등장해 마녀를 비난하던 방관자들은 많았지만 '마녀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는, 소위 피해자들이 부각된 것은 드문 것이기에 분명 눈에 띈다. 혜규의 언니 혜진과, 혜규의 동생 혜미가 그 대상인데 이들은 남편의 '바람' 때문에 속이 썩을 대로 썩은 상태다. 전경린은 왜 이들을 등장시켰는가. 일종의 비판이자 마녀론의 호응을 얻어내기 위함으로 보인다.

먼저 혜규와 극단의 위치에 선 인물은 혜진이다. 혜진은 혜규와 같은 여자 때문에 남편이 밖으로 돌아다닌다고 믿는 여자다. 실제로 그녀의 남편과 여자는 혜진에게 이혼해달라고 한다. 사랑 때문이다. 하지만 혜진은 절대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 대학 교수가 되려는데 이혼녀는 좋지도 않거니와 자신이 만든 '작품'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외친다. "일부일처제의 결혼과 가정, 이 사회의 제도와 가치와 관습과 법을 허깨비로 보지 마"라고. 그녀의 외침은 당당하다. 하지만 공허하게 들리는 건 왜일까?

혜미는 혜규와 혜진 사이에 존재한다. 실상은 혜진과 같지만, 혜규를 통해 '구원'같은 것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상당히 위험하게 여겨질 수 있다. 마녀가 누군가를 구원한다는 건 얼마나 얼토당토한 말처럼 여겨지는가. 하지만 마녀라고 불리는 그녀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의 정신은 세계의 패러다임에 갇혀 자신이 원하는 걸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수 있다. 혜규와 혜미의 관계가 그렇다. 그렇기에 어린 나이에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의 장난감이 된 여자아이에게 심각한 '정신적 폭행'을 행사했기에 번뇌하던 혜미의 마음은 안정을 얻게 될 계기를 얻는다.

혜규와 혜진, 혜미의 관계만 보더라도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전경린 소설에서 하나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짐작케 한다. 이제껏 전경린 소설에서 혜규와 같은 이들은 견디지 못하고 나갔다. 그 후는 구체화되지 못했는데 이제야 그것이 드러난 것이다. 물론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완전한 끝이 아니다. 아직 중간단계로 볼 수 있는데 어쨌거나 이것만으로도 전경린 소설에서 마녀로 낙인찍힌 마녀들의 '다음 이야기'를 궁금해 했던 이들에게 갈증을 풀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은 다양한 삶을 사는 여러 인물을 통해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마녀스러운 것'이기에 당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많다. 하지만 그 질문들은 유용한 것들이다. 세상이 마녀라고 부르든 어쨌든 간에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그것에 따라 삶을 개척하려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 동경하는 것일 테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 말이다.

내일 당장 그런 상황에 직면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과 함께 답을 찾아 떠나보자. 가슴 속에 묻어둔 것을 건드리는 이 소설은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지만, 분명한 도움을 주는 믿음직한 파트너가 되기에 충분하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도서정보 사이트 '리더스가이드(http://www.readersguide.co.kr)'에도 실렸습니다.

언젠가 내가 돌아오면

전경린 지음,
자음과모음(이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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