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의 시, 병든 몸의 아라리

병마와 싸운 젊은 시인 박진성 시집 <목숨>

등록 2005.12.30 15:28수정 2005.12.3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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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성 시집 <목숨>(2005) ⓒ 천년의시작

스물여덟 살의 젊은 시인 박진성의 첫 시집 <목숨>(천년의시작, 2005)을 읽었다. 얼마 전 어느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에서 박진성 시인을 처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그가 직접 사인을 하고 건네준 시집이다.

나는 그의 시집 <목숨>을 틈이 나면 가끔 찾아가는 지역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두세 시간 만에 집중해서 읽었다. 아니 그의 시집을 읽다보니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詩)의 행간(行間)에는 병마(病魔)와 부딪쳐 몸부림치는 젊은 시인의 절규와 피 냄새가 흥건했다.

시집 뒷부분에 놓여있는 산문 '병시(病詩)'에는 박진성 시집 <목숨>의 원형질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죽음과 삶이 예리한 각으로 서로를 찌르는 응급실, 그 찔린 자리의 피솟음, 찔린 자리의 상처, 상처의 무늬, 무늬를 일렁이게 하는 새벽 병동의 풍경들. 나는 전율한다. 내 시의 나침반은 병원을 향해서 계속 떨고 있을 것이다.---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면 아픔의 소용돌이랄까, 아픈 것들이 내뿜는 환한 빛이 느껴진다. '테오'를 빌려 나는 고흐의 광기를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그이의 몸에 달라붙기 위해 나는 1996년 정신병동, 끊어질 듯 잇대어 흐르던 내 몸의 신경과 울분과 울분의 폭발과 발작을 꺼내지 않으면 안 된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타라스콩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차를 타야하듯이 별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라고 썼는데, 내가 읽은 것은 그의 발작 후의 울분, 울분 지나간 자리의 고요이다.---'아라리'는 '病'의 몸을 관통하는 원심과 구심의 지루한 공방전이 낳은 '병-상태'의 몸이다. 나는 아라리의 움직임에 몸 싣는다."

박진성은 1978년 충남 연기 출생으로, 2001년 <현대시>에 '슬픈 바코드' 외 4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 속의 언술(言述)에 따르면 시인이 열아홉 되던 해인 1996년,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 병마(病魔)에 포박 당하게 된다.

그 후로부터 십년 가까이 상습불면, 공황발작, 정신분열, 자살충동, 응급실, 병동 생활에 맞서 싸워온 투병(鬪病)의 기록물이 시집 <목숨>이 전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시집 제목처럼 박진성 시인이 목숨을 걸고 싸워온, 시인의 몸에서 솟구쳐 오른 '불꽃'(이스끄라)이고 '아라리'다.

병(病)이 몸에 든 상태에서 그가 써내려가는 '아라리'는 주로 동생 테오를 애타게 부르는 고호의 말을 빌려 전하고('발작 이후, 테오에게' '반 고호와 놀다' '밀밭에서, 테오에게' '론강의 별밤, 테오에게' '테오에게'), 물 이미지를 통해서 그려지고 한다('목숨-금강에서' '남해에 들다' '물고기는 울지 않는다' '수궁에서 놀다' '적벽 가자').

또 (꽃)나무를 통해서 솟구쳐 오르기도 한다('동백신전' '외롭고 웃긴 가게-누워서 자는 나무' '나무야 누워서 자라' '자작나무 앞에서' '불꽃이었어, 병원이었어'). "열매를 밀어내는 식물 뿌리보다 더 깊은 강”으로 제 몸에 흐르는 질병 때문에 그의 시적 호흡은 절박하고 급박하다. 그가 쏟아낸 언어들은 하나같이 거센 불길에 얹혀져 타오르는 불꽃같다. 그의 시집을 펼쳐든 독자는 자기도 모르는 새 그 불길이 가슴에 옮아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리라.

1
피를 뽑으랴뇨 검사를 하시겠다? 엑스레이를 찍으라뇨 흉부에 이상 있을지 모르겠다? 혹시 모르니 소변을 보자구요? 나는 비등점이란 말입니다 내 안의 것들 타닥타닥 소리내며 몸 비틀고 있단 말입니다 응급실에 한두 번 오나요?

2
응급실에 누워 달을 보네 어떤 감사도 병(病)의 속까지 닿을 수는 없네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선 위에서 어머니 울고 있네 동서울병원 응급실에 누워 어머니 자궁(子宮) 같은 보름달을 보네

나는 나쁜 피가 터져 나오는 혈관, 자라지 말아야 할 나무 어머니 나무들은 그래서 봄이 오면 비명 소리 내지르는 건가요 물관 흐르는 물은 언제쯤 가지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나무들은 예쁜 상처를 갖게 되는 걸가요

3
내 몸에 묻은 어머니 지문들로 소용돌이치네 보름달은 어지러울 때도 둥글 뿐, 내 몸 하나 간신히 누일 침대에서 어머니랑 나, 오래도록 살았네 밤의 응급실이 나의 고향이었네 보름달 속이었네

-'나쁜 피-응급실' 전문


나무의 상처가 꽃이라면 박진성의 상처(病)는 불꽃의 시(詩)라 말할 수 있겠다. 제 몸에 넘쳐나는 불꽃을 넘어 푸른 "비상구"를 그가 끝내 찾아내기를 나는 간절히 희망한다. "울음보 움켜쥔 나는 쉼표처럼 더듬, 더듬, 물 속으로, 없는 길 내며 갔던 것이다"('물고기는 울지 않는다')라는 시행(詩行)을 읽으며 젊은 시인에게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건넨다. 젊은 시인아, 울음을 울며 가도 좋다. 중도에 좌절하지 말고 끝끝내 푸른 비상구, 없는 길 찾아내기를. 그대 힘찬 '아라리'를 부디 멈추지 말기를.

목숨 - 개정판

박진성 지음,
천년의시작,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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