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아내의 고향을 떠올려 봅니다

등록 2005.12.30 16:38수정 2005.12.30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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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혼하기 전에 처가는 시골이었으면 하고 은근히 바랐다. 시골 색시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라 해도 왠지 시골색시가 나하고는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마 내가 철저하게 시골사람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고향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시골에서 다 보냈으니 나의 모든 것이 시골 생활에 익숙할 것은 자명하다. 시골 길, 시골 집, 시골의 골목들, 또 시장까지도 시골의 장터가 내게는 제격이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래 그랬을 것이다, 아내도 시골이 고향인 여자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스무 살이 넘어 서울로 올라가 대학을 다니긴 했지만 서울은 여전히 내겐 낯선 곳이었다. 양옥집이 낯설고 빌딩들이 낯설고 문화가 낯설었다. 더군다나 나의 서울 생활은 가난으로 점철되었다. 가난한 대학생의 가난한 서울살이였다. 서울은 내게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다. 으리으리한 저택과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에서 작고 초라하기만 했다. 고급 승용차가 넘쳐나는 빌딩의 숲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다.

사랑도 꿈꾸어보았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가난한 시골뜨기가 서울의 명문여고 명문대 여학생을 짝사랑이라도 해본 것이 그저 다행일 뿐이다.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당당하게 연애를 시도해본 것으로 족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직장을 찾아 광주에서 몇 개월 지내다가 다시 인천으로 왔다. 인천도 대도시다. 인천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도시생활에 적응해갔지만 나는 여전히 시골뜨기였다.

시골아가씨 선호는 여전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시골여자를 아내로 맞이했다. 물론 아내의 고향이 시골이라고 해서 곧 그것이 조화로운 결혼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단 서울과 시골이라는 성장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없지 않겠는가.

아내의 고향은 충북 옥천이다. 결혼하고서야 처음 가본 아내의 고향에 나는 무척 당황했다. 시골도 시골 나름이지 그렇게 깊은 산골은 처음 가보았기 때문이다. 아내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고산 중턱에 모셔진 것도 낯선 풍경이었다. 그 후 나는 가끔 아내의 고향을 찾았다. 특히 가을에 아내의 고향을 찾아갈 때 울타리는 물론 길 가장자리며 산 중턱에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붉은 감의 행렬은 잊을 수 없다.

처가의 울타리에도 감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다. 아내의 고향 그 감나무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탐스러운 감을 주렁주렁 달고 인정 많고 따뜻했던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아이들이 몰려들어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감을 따던 옛일을 저 감나무도 아련히 회상할지 모른다. 그토록 정겹던 아내의 고향집도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장모님마저 자녀들 따라 상경하셔서 텅 비어 있다.

아내의 고향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고향은 날로 더 쓸쓸해지고 하나 둘 폐가가 늘고 있다. 우리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고향, 생활에 여유가 있게 되면 아내의 고향 마을에 가서 한동안 머물러야겠다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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