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차오르는 그믐달처럼 살아가자

<한 편의 시와 에세이> 박목월 '산이 날 에워싸고'

등록 2005.12.30 17:29수정 2005.12.31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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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술년, 개의 해가 다가오고 있다 ⓒ 이종찬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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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밤하늘에도 어둠을 밝혀주는 달이 있다 ⓒ 이종찬

"평생 논밭이나 감시로(갈면서) 씨나 뿌리고 살아온 니가 가기는 오데로 간다 말고? 무턱대고 공단으로 간다꼬 누가 '니 잘왔다' 캄시로(하면서) 뜨신(따뜻한) 밥이라도 한 끼 멕여준다 카더나?"

"송충이가 솔잎을 묵고 살아야지, 송충이가 풀잎을 묵고 우째 살끼고. 고마 좋은 말 할 때 씰데없는(쓸데없는) 생각 내비리고(내버리고) 농사나 차분하게 지으라카이. 농사 짓는 이기 별 거 아인 거 같아도 세 끼 밥은 멕여준다(먹여준다)카이.

"오데 그거 뿐이가. 백지(괜히) 넘들 눈치 안 봐도 되제, 내 하고 싶은 데로 해도 되제, 울매나 속 편하노. 다만, 농사 이기 쎄(혀) 빠지게 피땀을 쏟아도 돈이 좀 안 되서 좀 그렇지. 그라고 손톱 만한 재주 가꼬 촌에서는 지(자기) 잘났다꼬 까불어대도 막상 눈 깜짝할 새 코 베어먹는 놈의 세상 공단이란 데로 한분(한번) 가봐라. 니 재주 그거 가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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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늘 제자리에 서 있음으로써 사람들을 가르친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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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에는 저 푸르른 하늘에 떠도는 뭉게구름 하나 잡고 싶다 ⓒ 이종찬

197~80년대, 내가 살았던 동산마을(지금의 창원시 사파동)에서는 그 지독한 보릿고개와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멀쩡한 초가집을 내팽개치고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들은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작정 새로운 공단이 들어선다 하면 그곳으로 철새처럼 날아다녔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몇 년을 공단 주변에 구렁쇠처럼 굴러 다니다가 거의 상거지가 다 되어서야 마을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마을사람들 중에는 공단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허리를 다친 이들도 있었고, 공사판에서 시멘트 지게를 지고 오르다가 자칫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져 다리를 뿌러뜨린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때, 농삿일로 뼈마디가 굵은 마을 어르신들은 혀를 쯧쯧쯧 차면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도회지와 공단이란 곳은 꼬리 아홉 개 달린 백여시(백여우)처럼 시골 사람들의 등골까지 몽땅 다 빼 먹고, 더 이상 빼 먹을 게 없으면 쓰레기처럼 툭 내던지는 그런 지옥 같은 곳"이라고. "그런 곳에 가면 제 명줄대로 살지 못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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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간혹 꼬부라지기도 하고 바로 펴지기도 한다 ⓒ 이종찬

그렇습니다. 또 한 해가 저무는 길목에 서서 곰곰이 지난 삶을 되돌아보면 그때 그 마을 어르신들이 공단과 도회로 나갔다가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을 보고 내뱉은 그 말들이 하나도 틀린 게 없습니다. 그저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조용한 시골에 틀어박혀 논밭이나 갈며 씨나 뿌리며 사는 그런 삶이 훨씬 가치 있는 삶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골, 모든 욕심 다 팽개치고 조용히 "씨나 뿌리며" "밭이나 갈며" 살아갈 만한 그런 시골조차도 쉬이 눈이 띄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 고향처럼 아늑하게 보이는 시골이라 하더라도 막상 들어서면 그곳도 시골 같지가 않습니다. 이웃사촌이라 부르며 살가운 정을 나누는, 옛날의 다정하고 정겨웠던 그런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논값과 밭값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이 버려진 채 거미줄만 가득해도 집주인이 따로 있어 그냥 들어가 살 수도 없습니다. "집을 이렇게 버려두느니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집 관리도 하면서 그냥 좀 살자"고 하면 어느새 도회지에서 살고 있던 집주인이란 사람이 자가용을 타고 쪼르르 달려와 흥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논밭과 집이 겉으로 보기에는 무척 초라해 보여도 우리 가족들이 틈틈이 머리를 식히러 오는 주말농장이자 별장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저기 저만치 도로가 뚫리는 것 보이시죠? 저 도로만 뚫리고 나면 이 논밭과 집이 어디 한두 푼 오르겠습니까. 그래도 아저씨가 꼭 이 논밭과 집이 맘에 드신다면 내 두 눈 꼬옥 감고 싼값에 드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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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는 산마루에 올라 이 세상을 다시 한번 느껴보자 ⓒ 이종찬

'산이 날 에워싸고'란 이 시는 지난 1949년에 나온 <청록집>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내 자신이 흙내음이 물씬 풍기는 어느 한적한 시골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아무런 고통도 슬픔도 없는 그런 세상... 우리 사람들도 그저 대자연의 한 부분처럼 그렇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원한이나 미움, 아픔, 절망 등이 어떻게 생길 수 있겠습니까.

이 시에서 말하는 산은 세상살이의 온갖 어려움이자 시인이 태어난 고향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산 같은 온갖 장애물들을 만나다 보니, 오늘도 자연 그대로인 채 그 자리에 늘 머물러 있는 고향이 시인의 마음을 마구 잡아 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산에게서 이 세상의 더러운 꼬락서니 더 이상 보지 말고 어서 내 품에 돌아와 씨 뿌리고 밭이나 갈면서 살라는 속삭임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귀에는 산이 흙 속에 씨를 뿌리면 이내 싹이 트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듯이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는 말이 들리는 것입니다. 아니, 시인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시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호박 같은 모습이든 들찔레나 쑥대밭 같은 모습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또한 제 아무리 고개를 치켜들고 이 세상을 활개쳐 보아도 결국 대자연의 순환의 이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람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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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추운 땡겨울이라 해도 생명의 꿈틀거림은 막을 수 없다 ⓒ 이종찬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그믐달처럼 사위어지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라는 것은 모든 것들은 언젠가는 그믐달로 기울어지고 만다는 것을 늘 깨치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사람이든 풀과 나무든 처음 태어나면 점점 차오르는 것만 보입니다. 하지만 보름달처럼 모두 다 차오르고 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청록파'라고 하면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 시인을 말합니다. 이 시인들은 서로 시를 쓰는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대자연을 소재로 인간의 마음을 담은 시를 써온 시인들입니다. 청록파란 이름 또한 1946년 6월에 이들 세 시인이 <청록집(靑鹿集)>이란 공동시집을 펴내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런 까닭에 친일시인 서정주는 이 세 시인들을 '자연파'라고 불렀다지요.

박목월 시인은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나그네)란 시에서 보듯이 향토적 서정의 바탕 위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을 민요조로 노래했습니다. 이에 비해 '승무'의 시인 조지훈은 우리의 전통적 아름다움에 문화적 동질성을 담아 일제에 저항하는 시를 주로 썼지요. 그리고 해마다 새해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해'의 시인 박두진은 시 속에 자연에 대한 사랑과 기독교적인 신앙심을 심었다고 합니다.

병술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 묵은 삶을 훌훌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꿈꿀 때입니다. 하지만 그 꿈이 너무 커서 스스로 이루지 못할 그런 꿈이 되어서는 아니되겠지요. 아무쪼록 병술년 새해 아침에는 논밭을 갈면서 씨를 뿌리며, 뿌린대로 거두며 살아가는 농민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모습처럼, 그런 꿈을 꾸고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너무나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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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에는 그대의 꿈같은 해를 가슴에 한껏 품어보자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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