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거부 안한다고 '비양심적' 아닙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질문 여섯 가지에 답한다 ①

등록 2005.12.30 18:19수정 2005.12.30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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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 결정으로 인해 다시금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논란이 뜨거워졌다. 2001년 처음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제기된 이후, 토론회와 공청회를 포함한 토론의 자리가 무수히 많았지만 어떤 합일을 향해 전진해가는 것이 아니고 그저 서로의 확고한 견해를 확인하며 평행선을 달려가는 자리였을 뿐이었다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찬성의 비율을 조금이라도 높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려 함이 아니다. 소수자의 문제는 다수결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제시되는 반대 논리들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있어서 너무 억울하다. 최소한의 치명적인 오해가 풀리고 난 다음이라면 동의하고 동조하진 않더라도 최소한 매도하는 일만큼은 없지 않겠는가.

물론 이 기사에서 모든 질문을 다룰 수는 없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질문들만으로도 최소한의 오해를 풀고 편견을 벗어버리기에는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1) 왜 '양심'인가?
(2)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의무와 희생을 거부하는 무임승차 행위인가?

(3) 대체복무제도는 기피자를 양산하는 국방의 구멍이 될 것인가?
(4) 분단의 상황에서 시기상조인가?
(5) 대체복무제도가 생긴다면 대상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을 것인가?
(6)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1. 왜 '양심'인가?

양심적 병역 거부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댓글로 올라오는 최고 순위의 반론이 바로 '양심, 비양심' 논란이다. 사실 얼핏 들으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은 양심적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양심적인 사람으로 구분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양심적 병역 거부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오해라는 것을 역설하고 싶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양심(良心)'이라는 표현은 한문 뜻풀이 그대로 '선한 마음'으로서 '저 사람은 참 양심적이야', '저 사람은 양심에 털이 났어' 하는 식으로 사용되어 '공유되는 선한 마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법적인 의미의 양심은 그렇지 않다. 헌법재판소에서 말하는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이다. 달리 말하자면 개개인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가치관과 행동의 동기를 부여하는 중심(中心)이라 할 수 있겠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병역을 수행한 사람이든 거부한 사람이든 모두가 자신의 가치관대로, 자신의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가 행동을 하도록 했기 때문에 모두가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오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굳이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표현을 고집하는 것일까. 대안적 표현으로 '종교적 병역 거부' 내지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 등등이 제시되고 있지만 어느 것도 쉽사리 채택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큰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종교적 병역 거부' 내지는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 등의 표현은 포괄성이 좁기 때문이다. '종교적 병역 거부'라는 말은 다분히 특정 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겠지만, 사실 평화 신념은 종교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최근의 몇 년간 사회적으로 조명을 받고 있는 병역 거부자들 중 다수는 비종교적인 신념으로 병역 거부를 선언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소수자인 병역 거부자들 가운데서 또 종교인과 비종교인을 구분하는 것은 소수자 내부의 소수자를 만들어내는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두 번째 이유는,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표현이 외래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그것이 국제적인 통용어이기 때문이다. '양심적 병역 거부'는 영문으로 'Conscientious Objection'이다. 약칭 C.O로 표기되며 국제법과 유엔 인권위원회 자료 등에서는 너무나도 일반화된 표현이다. 'Conscientious'는 '양심적인' 이외에 다른 말로 번역할 수 없다. 달리 번역한다면 오역이 된다('Conscientious'에 정확히 일치하는 한국어 표현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실정에 따라 용어를 변형시켜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문제가 비단 한국에서만의 문제는 아니며 병역 거부 자체가 국경과 인종, 사상, 종교를 초월한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기에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더구나 한국은 유엔 인권위원회 이사국이기 때문에 국제적 통용어를 사용할 책임 아래 있기도 하다.

위와 같은 사실들이 '양심적'이라는 민감한 표현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 사실들은 이미 토론회와 공청회 등을 통해 많이 알려져 왔으며 "이제 더 이상 '양심' 얘기는 그만하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표현을 너무나도 당연히 사용하고 있으며 그 표현에 문제를 제기한 적은 없다.

양심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더 없을 것 같아 이 기회에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간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양심에 대한 개념은 두 가지로 나뉜다. 칸트의 주관주의적 관점에서는 양심을 "자기 확신의 진정성"이라 정의하며, 헤겔의 객관주의적 관점에서 양심을 바라보면 양심은 "객관적 인륜" 즉 '누가 보아도 옳은 것'으로 정의한다.

칸트의 견해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양심의 정의이며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양심의 개념이다. 그러나 "군대가는 것은 비양심이냐"라고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 양심을 헤겔의 '객관적 인륜'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의 객관주의적 양심은 일견 옳은 말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대단히 위험한 생각이다. 그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양심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즉, 다수의 잣대에 비추어봤을 때 옳지 않다면 무조건 틀린 것이 되어 단죄 받는, 철저히 개인이 배재되는 개념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개념이 된다.

2. 양심적 병역 거부는 의무와 희생을 거부하는 무임승차 행위인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은 '면제'를 주장한 적이 한번도 없음에 유의해야 한다. 의무를 다할 테니 적합한 방법을 제시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입맛에 맞추려는 것 같아 보인다면 그들이 현재 받고 있는 처우를 살펴보길 권한다.

그들이 적합한 방법이 없기 때문에 '감옥'으로 가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입맛'의 문제일까? 그들은 "군복무도 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다른 방법을 제시해 달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얼마 전 KBS 라디오에서 한 청취자는 자신의 군 시절 경험을 이야기 해 줬다. 그분은 정상적인 군복무자였는데, 자신과 한 부대에 배치된 어떤 사병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지 못하고 군복무를 받아들인 것이 못내 괴롭고 견딜 수 없어 자살을 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

극단적인 경우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그만큼 절박하고 생사와 관련된 절대적인 문제다. 앞서 살펴본 '양심'의 정의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투정을 부리는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고 진지하게 귀기울여줘야 할 문제인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무임승차자로 만드는 것은 국가다. 대안을 마련해 주지 않는다 해도 그들은 감옥을 택하기 때문에 어차피 국방력에 일조되지 않는다. 대체복무 제도를 마련해 줬다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성실한 일꾼이 됐을 젊은이들을 '감옥'에 넣어 둠으로써 본의 아니게 사회에 도움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열심히 일을 할 마음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

그렇다. 이 문제에 관한한 가장 크게 책임을 통감해야 하는 것은 정부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정부의 직무유기가 지금껏 만 명이 넘는 무임승차자를 양산해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 전 있었던 서울 시내버스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시내버스와 지하철의 환승제도가 생긴 직후, 시스템에 문제가 생겨 각 버스에 달린 카드 단말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적이 있었다. 이때 서울시는 어떤 방법을 제시했을까? "지금은 카드단말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현금을 내라"고 요구했을까? 그렇지 않았다. '무임승차' 시켰다.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않았을 때는 응당 시가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는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제도를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헌법의 정신이고 국제법의 요구이기도 하다(유엔 인권위 77호 결의안 가운데는 '각국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위해 양심적 병역 거부의 취지에 합당한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고 대한민국은 유엔 인권위 이사국으로서 적극 동의하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제도를 제대로 만들어야 할 책임은 외면한 채 무조건 처벌만 해 오고 있던 것이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해보자. 군복무만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유일한 길인가? 대한민국이 국민에게 군복무의 의무만을 요구하는 병영국가인가? 많은 경우 국방의 의무=병역 의무라고 생각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국방의 의무는 남녀노소 모두가 직간접적으로 이행해야 하는 폭넓은 것이지만, 병역법은 헌법에 비해 예외사항이 참으로 많은 하위법에 불과하다.

더구나 우리 사회는 다양한 종류의 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에 꼭 군사력으로 철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할지라도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일로 일정 기간 의무 종사하는 것을 '국방'으로 본다는 것이다. 국방부도 병무청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만 대하면 '병역' 이외에는 국방의 의무를 다할 방법이 없는 척 한다. 대한민국은 OECD 가입국가며, 대내외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접어들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나라다. 병역이라는 방법 외에는 국방의 의무를 다할 방법이 없다고 고집 부리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주장이다.

부언하자면, 국방의 의무와 양심의 자유 두 개를 헌법의 저울에 놓고 무게를 달아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무거울까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금번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문 가운데는 이런 표현이 있다.

"우리 헌법 제19조와 자유권규약 제18조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 학문, 예술의 자유와 함께 내심의 자유에 속하며, 정신적 자유의 모체를 이루는 인간존엄성의 기초로서 정신적 자유의 근원을 이루는 국가비상상태에서도 유보될 수 없는 최상급의 기본권이다."

전체주의 사회가 아니라면, 양심의 자유는 최상급의 기본권으로서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오늘 다룬 두 가지 질문을 다시 요약하자면,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이 다소 민감하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면이 없지는 않으나 포괄적인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고, 이미 국제적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용어이기에 함부로 바꿔 부를 수 없다는 것과, 대체복무제도는 국방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대체적 방법으로써 '병역'만이 국방이라는 왜곡된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덧붙이는 글 |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3) 대체복무제도는 기피자를 양산하는 국방의 구멍이 될 것인가?
(4) 분단의 상황에서 시기상조인가?
(5) 대체복무제도가 생긴다면 대상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을 것인가?
(6)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라는 질문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김재현 기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3) 대체복무제도는 기피자를 양산하는 국방의 구멍이 될 것인가?
(4) 분단의 상황에서 시기상조인가?
(5) 대체복무제도가 생긴다면 대상자의 '양심'을 심사할 수 있을 것인가?
(6)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인가?

라는 질문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김재현 기자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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