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단편소설] city999 (2)

등록 2005.12.31 15:17수정 2005.12.31 15:16
0
원고료로 응원
아무튼 무엇으로 부르든지 그것은 내 자유가 아니겠는가. 나는 나를 부르는 순이를 보기 위해 돌아누웠다. 뽀얀 젖가슴을 드러낸 순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추스르며 순이가 알몸인 채로 침대에 누워있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침대머리에 기대었다.

“괜찮으세요?”
“어떻게 된 일이지?”
“새벽 3시 경에 들어오셨는데 술을 많이 드셨어요. 물과 약을 갖다드릴까요?”
“그런데 너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주인님께서 저를 부르시고 제 옷을 벗기셨는데 기억나지 않으세요?”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고, 숙취로 인한 두통이 몰려왔다. 나는 순이에게 술 깨는 약을 가져오게 하고 샤워할 동안 늦은 아침식사를 차리게 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얼마 전, 생물로봇과 잠자리를 같이했다는 동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난 세기의 영웅담을 전하는 사람처럼 동료는 상기된 표정으로 생물로봇과의 밤을 세세하게 설명하였다. 듣고 있던 동료 한 명이 호기심어린 눈길로 느낌을 물어왔을 때, 끝내준다는 표현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던….

생물로봇과의 섹스가 독신남녀의 본능적 욕구를 해결해줄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일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욕망을 위해 생물로봇의 신경회로를 개인이 조작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는 것이다. 플라스틱이나 금속느낌의 예전로봇을 대체한 생물로봇이 출시된 것이 석 달 전임으로 로봇회사가 신경회로를 비롯한 R-six의 핵심적 부품단가를 시장에 맞게 공급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임이 분명했다.

시장에는 벌써 R-six의 신경회로를 조작할 수 있는 불법프로그램이 무분별하게 떠돌고 있었다. 생물로봇과의 환상적인 섹스를! 이것이 조잡한 프로그램을 팔아먹는 무허가업자들의 공통된 문구였다. 아마도 R-six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동료도 자신의 옛 애인과 함께 했던, 서로 즐기는 섹스가 아닌 자신만의 일방적인 성욕을 쏟아 부은 것에 불과할 것이다. 아니면 R-six의 신경회로를 인간의 잠자리 수준으로 끌어올리기위해 그가 몇 년 치의 급여를 지불할리는 없을 테니까.

샤워를 끝내고 식탁에 앉자 순이가 해장국을 가져왔다.

“더 필요한 게 있으세요?”
“아니 됐어.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어젯밤에 말이야.”
“네”
“우리가 같이 잤었나.”

R-six가 집에 온 첫날 이름도 붙여주고 석 달 동안 집안일을 도왔지만 로봇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순이는 내 기분을 안다는 듯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옷을 벗기시고는 바로주무셨어요. 그이후로 아무말씀도 없으시기에 전 주인님 곁에 누워있었습니다. 지난밤에 기록된 홀로그램을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 됐어. 오늘일정이나 알려주지.”

로봇과 잠자리를 한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순이가 알려주는 일정을 확인하고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법원을 다녀온 사실을 알고 있는 동료들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위로의 말들을 건넸다. 사실 동거인을 수십 번 바꾼 동료들도 있었고 독신을 고집하는 동료들도 있었지만 나를 비롯한 그들은 커플매니저이기 때문에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동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내방에 들어서자 도착한 메시지들의 제목이 홀로그램으로 나타났다. ‘동거종료에 따른 고객관리프로그램’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3년 전에 가입한 보험회사로부터 온 것인데, 비슷한 제목의 고객관리상품이 내가 다니는 회사에도 있었다. 내용은 이별한 커플들을 위한 새로운 파트너소개프로그램인데 보험회사에서 새로운 파트너를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고 어떤 내용인지 선뜻 기억나지 않아 파일을 열어보았다.

은하생명보험에서. 법원으로부터 귀하의 동거종료판결이 있었음을 통보받았습니다. 이에 귀하가 3년 전 가입한 은하생명보험 상품의 약관에 따라 동거종료에 따른 심리치료와 city999의 휴양이 제공됨을 알려드립니다.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실 수 있으며 본 상품의 사용을 원치 않으실 경우에는 일주일이내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심리치료와 휴양이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하기위해 곧바로 보험회사의 상담실을 연결했다. 동거종료에 따른 심리치료는 병원에서 전문의상담을 통해 그에 따른 우울증이 있으면 약물치료를 무상으로 받을 수 있고 약물치료가 아닌 휴양을 겸한 여행상품을 택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법원의 강제성에 의해 이루어진 동거종료와 그에 따른 심리적 안정을 위한다는 구실로 보험회사가 제공하는 요양휴가를 회사에 요청할 수는 없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3. 3 [단독] 윤석열 장모 "100억 잔고증명 위조, 또 있다" 법정 증언
  4. 4 "명품백 가짜" "파 뿌리 875원" 이수정님 왜 이러세요
  5. 5 여론조사로 본 4.10 총선 판세는?
연도별 콘텐츠 보기